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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04. 2024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2024.10.4.

오늘의 문장
좋은 글이란,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써야 하며, 공학적으로 배치된 글이어야 한다.

첫째,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할 것. 좋은 글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뜻한 바를 백 퍼센트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이 써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이도록 만들어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신형철,『인생의 역사』, 253쪽




나의 문장


글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 마련입니다. 이왕 하는 거 좀 더 잘하고 싶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 글쓰기에 목숨을 거는 유형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글을 쓴 본인만 읽고 만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맞춤법이 어긋났든, 식상한 표현이 있든 그건 하등의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읽으면서 누구보다도 자신의 글에 공감할 것은 뻔하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쓴 글이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부터 어쩌면 글쓴이의 손을 떠나 여기저기 유랑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어떤 사소한 것도 허투루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점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글을 읽게 될 수많은 사람들, 게다가 더 불안한 것은 일면식도 없는 온라인상의 정체불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쓴 글을 읽게 된다는 점은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해 보면 될 듯합니다. 일단은 글을 쓴 본인을 만족하기 위해서 좋은 글을 써야 하는 당위성이 성립합니다. 다음으로는 우리의 글을 읽을 누군가의 그 시간과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우린 좋은 글을 써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문장으로 떠오른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의 '좋은 글의 세 가지 요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는,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하는 글, 정확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 그리고 공학적으로 잘 배치된 글을 좋은 글의 세 가지 요건으로 꼽고 있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하나하나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하는 글을 쓰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좋은 글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애매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하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독자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독자라는 입장이 대체로 그렇듯 각양각색의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작품 속에 반영될 가치라는 것은 작가가 설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한 가치는 취향이나 입장과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인식되는 그 어떤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한 탓인지 요즘의 문학은 사실 가치의 인식적인 차원을 벗어나 취향이나 입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속칭 '팬덤'에 의한 문학 결과물의 생산으로 이어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읽어주지 않는 작품은 쓰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작품이라는 것이 독자를 겨냥하고 쓴 것이니 완벽히 그들을 외면한 채 작가의 세계관에만 빠져 작품을 생산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긴 합니다. 다만 너무 독자의 취향에 휘둘려 작가가 자신의 가치나 사상을 버리고 작품을 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저는 첫 번째 요건을 이해하려 합니다.


다음으로 정확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쓰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정확한 문장은 창작자가 의도하는 바를 완전무결하게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단련하길 요구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최소한 자신이 글을 쓴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요건만큼은 가볍게 듣고 지나가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겨납니다. 과연 이 '정확한 문장'을 우리가 구사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운동이든 공부든 혹은 일이든 정확하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는 순간에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거기에만 전념해야 하고 어쩌면 수백 수천 번 반복해서 조금의 빈틈도 없을 정도로 수행이 되어야 정확한 경지에 이르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정확성'을 갖추려면 수많은 노력 못지않게 그만큼 길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냥 흔한 말로 무엇이든 무르익으려면 때가 되기를 기다려야 하고, 그 때라는 것은 결국 시간의 경과가 있어야 가능한 것일 테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 수없이 글을 쓰고 그 글을 다듬어야 할 일종의 의무가 생기는 셈입니다. 보다 더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공학적으로 잘 배치된 글을 쓰라고 말합니다. 모든 문장에 제자리에 놓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태생적으로 문과 체질이라 그런지 사실 '공학적으로'라는 말 자체에 어느 정도의 거부감이 생기긴 합니다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 공학을 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낱말로 풀어주고 있습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을 정도로 모든 문장이 제자리를 찾아간 그런 글을 바로 공학적으로 잘 배치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제게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쉬운 말로 이 세 번째 요건을 이해하려 합니다.


비문이 없게 하라.


비문은 일반적으로 문법이나 어법에 어긋나는 문장을 말합니다. 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아내려다 문장이나 문단 안에서 낱말들이 충돌이 일어나 앞뒤가 안 맞고 연결도 제대로 안 되는 글이 있다면 이때 비문 때문에 글이 흐려졌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문이 많은 글은 글 자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기 마련입니다. 가령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절절한 마음을 편지에 담아 전달한다고 해도 오탈자가 수두룩한 형편이라면 그 사람의 진실한 마음이 와닿기 전에 편지를 그만 읽고 싶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비문을 줄일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저에게 조금의 오만함을 허락해 준다면 비문을 쓰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첫째, 저는 비문을 쓰지 않기 위해 일단 떠오른 문장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완성시킵니다. 글을 경험상 사색이 많은 글쓰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글을 많은 생각이 끼어들면 오히려 문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더군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문장은 단숨에 적어 내려갑니다.

둘째, 비문은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는 귀로 들었을 때 더 잘 가려지는 듯합니다. 보통 때에는 제가 쓴 글을 눈으로 훑어 내려가지만 가령 소설을 고쳐 쓸 때에는 반드시 소리 내어 읽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마치 그 순간은 제 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조금은 더 제삼자적인 입장에서 귀에 거슬리는 표현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수행하니 적어도 제 글에는 비문이 없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문이라는 자체가 제겐 보이지 않아도 타인에겐 충분히 보일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한 문학평론가의 말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그가 말한 세 가지 요건은 글을 쓰고 있는 저에게도 큰 시사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출간을 하든, 등단을 하든, 혹은 이도 저도 아니든 간에 명색이 글을 쓰고 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건 당연한 바람이자 마음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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