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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07. 2024

제논의 역설

사백 스물일곱 번째 글: 눈을 의심해야 할까요?

아침에 기차를 타고 출근하다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대구역에서 기차를 타면 5분쯤 뒤 작은 철교가 나옵니다. 이 철교에 이르기 1분 전쯤 고속 열차인 KTX는 다른 선로로 가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KTX도 무궁화나 ITX-새마을 열차와 나란히 달립니다. 가장 속력이 빠른 KTX가 시원하게 달리는 모습은 무궁화 열차에 탄 제 마음까지 들뜨게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바로 이 구간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곤 합니다.


언젠가 한 번 역무원에게 제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다른 차량들과 비교해 무궁화 열차가 전혀 느리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 무궁화 열차의 최고 속도가 얼마쯤 되나요?"

"네, 최고 150km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어지간히 정신 나간 차가 아니면 그만한 속도로 달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역무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차 안에서 본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차량의 속도가 잘못 본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KTX 열차의 최고 속도는 300km를 넘어섭니다. 무궁화 열차와 비교하면 무려 두 배나 빠른 것입니다. 게다가 KTX 열차는 대구역을 정차하지 않고 통과합니다. 그러면 동대구역에서부터 출발했으니 오히려 무궁화 열차보다 가속을 받아 달려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바로 그 구간, 즉 선로가 갈리기 시작하는 그 지점 앞에서 KTX는 마치 서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전에 둔 지하 터널로 들어가 새로운 선로에 들어서기 위해서일 겁니다. 바로 그때 나란히 달리는 무궁화 열차가 얼마간 KTX 열차를 앞지르는 진풍경이 연출됩니다.


누가 봐도 무궁화 열차보다는 KTX 열차가 빠릅니다. 과학적으로나 수치상으로도 그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펼쳐지는 20초가량의 이 볼거리는 사람의 눈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게 못 되는지를 뒷받침해 주는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득 제 눈으로 무궁화 열차가 KTX 열차보다 빠른 것을 보면서 그 유명한 '제논의 역설'이 생각났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변증법의 창안자로 일컬은 제논은,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과 화살의 역설 등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은 달리기 경주에서 더 빨리 달리는 사람이 보다 더 느리게 달리는 사람을 결코 앞지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가령 아무리 자다가 깨어 일어나 전력으로 달려간다고 해도 이미 토끼를 앞지른 거북을 토끼가 추월할 없다는 논리입니다. 왜냐하면 토끼가 움직인 만큼 거북도 자기 나름대로의 속도로 움직이면 결국 경주가 끝날 때까지 사이의 간격은 영원히 좁혀질 없는 것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을 무한대로 토막을 있다면 적어도 시간만큼은 화살이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다는 게 바로 화살의 역설입니다. 이와 유사한 논리로 원은 곡선이 아니라 없이 많은 직선들로 이루어진 도형이라는 것도 제논의 역설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제논의 역설'은, 만물은 흐른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그들의 말은, '만물은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정지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주변의 움직이는 것들을 가리키며 무슨 소리 하느냐고, 저렇게 움직이고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때 제논은,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의 착각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두 대의 기차를 보면서 '제논의 역설'이 생각났던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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