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주제: 수련회와 관련한 추억이 있나요?
진로를 정하기 전에 사람들은 다양한 것을 해보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하면 많은 경험을 쌓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고 어디에 적성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것저것 다 해보게 되는 듯합니다. 저의 고등학교 시절이 그랬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라고 말씀하셨지만, 눈치는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제 성적이 되고 안 되고는 관계없이 의대나 법대를 가겠다고 하면 적극 밀어주겠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엉뚱하게도 태권도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과연 저에게 그런 자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태권도를 하며 저는 사는 보람과 기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마치 지금처럼 글쓰기에 흠뻑 빠져 있던 때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고1 때 처음 다니기 시작한 태권도 도장에서 열심히 수련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관장님이 제게 앞으로 대학은 무슨 과로 갈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흔하게 묻는 말씀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저였습니다. 그분은 저희 아버지와 의형제의 연을 맺은 분이셨으니 당시 제게는 작은아버지 같은 존재셨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태권도를 제대로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남자의 평균치 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은 제가 관장님께 키나 너무 작아서 태권도를 하는 건 그리 효율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 임마! 이소룡도 키가 작다."
물론 저보다는 더 컸다고 하셨지만, 키가 크고 작은 건 태권도를 하는 것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고심한 끝에 저는 태권도학과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제가 다니던 도장엔 수십 명의 수련생들이 있었지만, 전 그때 특별 관리 대상이었습니다. 그냥 일반적인 승급 혹은 승단 대상자가 아니라 체대나 아니면 일반 대학교라도 태권도학과에 진학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친구들이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저는 남아서 두어 시간씩 개별 수련을 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관장님의 특별 지시를 받은 사범님이 제게 개별적인 지도를 했고, 관장님도 자주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해 여름, 전 태권도 도장에서 실시한 1박 2일 여름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신나게 먹고 마시며 (물론 음료수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참가한 모든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었으니까요.) 즐겁게 노는 동안 전 특별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타이어를 허리에 매달고 달리기, 깃발 두 개를 꽂은 구간을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왕복으로 달리기, 종아리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해변을 달리기 등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프로그램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품새들을 수도 없이 해야 했고, 발차기는 사범님이 'OK'라고 하실 때까지 반복해야 했습니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것 같은데도 감히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작은아버지보다는 아무래도 의리로 맺은 작은아버지가 제게는 더 어렵기 때문이겠습니다.
거의 실신할 정도가 되면 한 번씩 주어지는 음료수를 들이켜며 전 제게 주어진 2~30분의 쉬는 시간을 아끼고 또 아껴 써야 했습니다. 그 시간이 끝나면 또 지옥의 훈련 돌입이었으니까요.
사실 그때는 시쳇말로 몸매 좋은 여자들이 수영복을 입고 지나다니는 것도 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같이 간 수련생들이 뭘 하면서 신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습니다. 함께 도장을 다녔던 친구들이나 선후배들도 으레 저는 태권도학과를 가야 하는 처지라 특별 관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려 36년 전의 일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때 그렇게도 열심히 수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태권도학과에 진학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살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종종 그때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새록새록 생각나는 어떤 추억 같은 건 없었던 수련회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압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때만큼 힘든 시기는 없었기 때문에 그때만 생각하면 제가 이겨내지 못하는 고난은 없을 거라는 걸 말입니다.
그 여름의 바다, 그 수련회에서의 경험은 제게 참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