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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13. 2024

첫 문장에 집착하지 맙시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시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 김승옥, 『무진기행』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 박경리, 『토지』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김훈, 『칼의 노래』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 한강, 『채식주의자』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 정유정, 『7년의 밤』


글을 쓰다 보면 '첫 문장'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를 들어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했다고 가정한다면 심사위원들이 작게는 수백 편에서 많게는 천 편이 넘어가는 그 많은 작품을 일일이 읽어 본다고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결국 심사위원들은 '첫 문장'을 포함해, 짧게는 한두 문단에서 길어봤자 A4 1장 정도를 읽을까 말까 하지 않겠냐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 '첫 문장'에 지나칠 정도로 공을 들이기 마련입니다.


물론 '첫 문장'을 멋지게 쓴 사람이, 그다음 문장들을 엉망진창으로 쓸 일은 없을 것입니다만, 저는 첫 문장의 중요성을 조금은 퇴색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냥 쉽게 얘기해서 모든 문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건 어떤 글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스토리가 위주인 소설 쓰기에서는 보다 더 긴 호흡이 필요할 것일 테니, 각 문장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습니다.


소설 쓰기라는 것은 결국 수백 혹은 수천 개의 문장이 연결되어 한 편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작업입니다. 그건 마치 여러 개의 객차가 체인에 연결되어 목적지로 가는 기차와도 같은 것입니다. 당연히 연결된 객차의 수가 많을수록 운행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KTX나 SRT처럼 속력이 빠른 기차일수록 운행 전에 더 세밀한 점검이 필요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같은 논리로 생각해 보면, 단편소설을 쓸 때보다 중편소설에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고, 장편소설을 쓰는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차원의 접근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소설가는 아닙니다만, 제가 소설을 써 본 일천한 경험을 떠올려 봐도 이건 명백한 사실인 듯합니다.


좋습니다. 단편이건 중편이건 혹은 장편을 쓰건 간에 소설의 서막을 여는 것은 그 작품의 첫 문장입니다. 일단 여기에서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첫 문장'이라고 지칭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초고 상태의 원고를 퇴고할 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바로 첫 문장 다듬기라고 합니다. 첫 문장은 원고를 펼쳤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어쩌면 각종 공모전에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눈여겨보는 대목인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제출한 원고의 '첫 문장'이 사람을 사로잡을 만한 정도가 된다면 일단 그 원고는 합격점을 부여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두에 우리나라 소설 몇 권에 나온 '첫 문장'을 뽑아봤습니다. 일단은 제가 다 읽어 본 소설들로만 추려봤습니다. 그래야 이야기하기가 쉬울 테니까요. 

어떻습니까? 시쳇말로 임팩트가 확, 하고 느껴지는 것 같습니까? 첫 문장의 중요성을 말할 때마다 늘 거론되는 그 부분, 즉 첫 문장을 읽었을 때 도무지 그다음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강렬한 충동이 느껴지는지요?


솔직히 저는 이 문장들을 읽었을 때, 반드시 다음 문장을 계속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뒤가 궁금해서 도무지 견딜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지도 않습니다. 그나마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한강 씨의 『채식주의자』, 그리고 정유정 씨의 『7년의 밤』 정도는 궁금증을 자아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이들을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건 어쩌면 제가 이 작품들을 이미 다 읽어봤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위에 열거한 그 어떤 작품도 읽지 않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작품을 쓴 작가의 유명세 따위가 작품을 끝까지 읽게 하는 추동력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를 들어 김훈 선생의 작품이라면, 박경리 선생의 작품이라면 믿고 읽을 수 있다, 하는 그런 생각들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이겠습니다. 그건 어쩌면 '첫 문장'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거의 정설처럼 믿고 받아들이는 첫 문장의 중요성이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첫 문장'이라는 표현 대신 '최초의 문장'이라는 말을 썼으면 합니다. 왜 굳이 멀쩡한 말을 놔두고 '최초'를 언급하느냐 하면 '첫 문장'에 너무 집착하면 작품을 집필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적어도 작품의 '첫 문장'은 없다고 생각하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습니다. '첫 문장'이 아니라 '최초의 문장'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 최초의 문장 다음에 또 다른 문장이 오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문장이 옵니다. 이 과정을 수백 혹은 수천 번 반복하면 작품 한 편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바로 그 첫 문장뿐만 아니라 모든 문장이 똑같이 중요한 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하는 얘기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쓸 때,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 빌어먹을 '첫 문장'에서 힘을 덜 빼면 작품을 써 나가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 문장에 너무 매달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냥 작품을 쓸 때의 '최초의 문장' 정도의 의미만 부여하고 작품을 쓰시라는 말입니다. 그나마 초고를 완성한 상태에서 첫 문장을 다듬는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고작 작품을 이제 막 쓰기 시작하면서 그 '첫 문장'을 갈고 다듬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작품 집필 초기에 그 '첫 문장'을 두고 고민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때 우리가 인식하는 '첫 문장'의 중요성은 창작자에게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릅니다.


첫 문장,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문장이라 생각하시고, 일단 그 최초의 한 문장을 던져놓은 뒤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작품을 쓰시는 게 보다 더 합당한 방법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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