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작이 Oct 19. 2024

우산

267일 차.

빨래를 널고 있는데 밖에서 때아닌 돌풍이 불었습니다. 날씨가 미쳤군, 한 마디 하며 널던 빨래를 마저 널고 있었는데, 잠시 병원에 갔던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어지간하면 그냥 오겠는데 걸어올 수 있는 비의 양이 아닌 것 같다며 우산을 좀 가져다 달라더군요.


여분의 우산을 챙겨서 집을 나섰습니다. 아파트 밖으로 나가 보니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산을 쓰고 있으면 까뒤집어질까 싶어 안간힘을 줘야 할 정도라고나 할까요? 아들에게 우산을 하나 쥐어주고 집 쪽으로 발길을 옮기던 중이었습니다. 작은 개인 빵집 하나를 지나는데 눈에 밟히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웬 남자분이 마트에서 장을 본 종량제봉투 2개를 한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머지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이의 나이는 많아 봤자 4살쯤으로 보였습니다. 크지도 않은 저희 동네 마트를 이용한 걸 보면 분명 인근에 사는 분 같아 보였습니다. 빵 가게의 처마 밑에 서서 아이의 손을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더군요. 강풍에 비까지 사선으로 들이치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두 번 고민할 것 없이 발길을 돌려 그분에게 가서 섰습니다.


혹시 비 때문에 못 가고 계신 거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어디 사시는 분이냐고 물어보니 저희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분인 듯했습니다. 아이도 있고 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일단 우산을 빌려드릴 테니 지금은 쓰고 가시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남자분이 무척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더군요. 우산을 어떻게 돌려 드리면 되냐고 묻기에 아파트 관리실에 맡기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제 이름 석 자를 다 말하려니 뭔가가 개운치 않아서 두 글자만 가르쳐 주면서 말입니다. 이럴 때에도 개인정보에 대해서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참 거시기했습니다.


제가 쓰고 있던 긴 우산을 그 남자분께 드리고 나니 아들이 제게 와서 우산을 같이 썼습니다. 아들이 제게 그러더군요. 대단한 일은 아니라도 정말 잘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그 어린아이만 서 있지 않았으면 아마도 두 번 고민 안 하고 지나갔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스쳐 지나가면서 계속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게, 우리 우산은 두 개니까 하나는 저 남자분 드리고 가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는군요. 그러던 차에 제가 먼저 선수를 친 셈이었습니다.


이런 것도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보니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눈길부터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발길을 옮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러고 보니 2주 전인가 동네 재래시장에서 이벤트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긴 우산을 네 개나 사은품으로 받아 왔었습니다. 그것도 제 손으로 말입니다. 뭐, 조금 전의 그 남자분이 우산을 돌려주지 않아도 혹은 돌려주지 못하는 사정이 생기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 우산이 네 개나 생겼었으니까요. 어쨌건 간에 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는 그 남자분을 보며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