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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Nov 01. 2024

말은 해야 그 마음이 전해집니다.

2024.11.1.

오늘의 글
사랑해, 행복해, 미안해, 고마워, 파이팅…….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쓰는 말들이죠. 너무 많이 써서 그만 닳아버렸습니다. 이런 닳은 단어들은 마음에 와닿지 못하고 데구루루 굴러가 버립니다. [중략]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매일 그저 사랑한다고만 몇천 몇만 번을 반복한다면? 더 이상 설레지 않을 겁니다. 슬슬 지루해질 것 같아요.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반복하면 그렇습니다. 이럴 때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기분이 드는지를 말하는 게 낫죠. 구체적으로 어떤 각오, 어떤 마음이 생겼는지를요. 너무 커서 한입에 먹을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 사랑. 이걸 먹기 쉬운 크기로 잘라주는 겁니다.
‘사랑해! 오늘도 파이팅!’이라고 메시지를 백 통 보내는 것보다 ‘오늘 너를 생각하면서 셔츠를 골랐어. 만날 것도 아닌데, 괜히 네가 좋아하는 색으로 고르게 되더라. 출근했지? 네가 싫어하는 사람은 한 번도 안 마주치는 그런 하루 보내길’이라고 한 번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두 메시지는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죠. 다만, 두 번째 메시지를 읽은 사람은 사랑의 모양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생긴 감정이 그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생생히 알게 되었으니까요.
사랑이라는 말은 흔하기도 하지만, 도무지 한 번에 깨어 물 수 없는 커다란 단어입니다. 그 대신 셔츠 고를 때의 내 기분, 네가 좋아할 만한 걸 고르게 되는 마음,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길 바라는 소망. 이렇게 소화하기 좋은 크기로 쪼개어 입에 쏙쏙 넣어주는 거죠. ☞ 박솔미, 『글, 우리도 잘 쓸 수 있습니다』, 133~135쪽          




나의 글


위에 인용된 책의 저자는, 자주 쓰는 말은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닳아 없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기껏 그렇게 내뱉은 말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 채 데구루루 굴러가 버린다고 했고요. 표현이 꽤 참신하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습니다. '데구루루 굴러간다'는 말은 네모 반듯하다는 뜻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꽤 둥글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대체로 둥근 것이 데구루루 굴러가면 사람이 제 아무리 빨라도 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법입니다.


한편, 자주 쓰는 말은 혹은 상황이나 상대방에 따라 모종의 변화를 주지 않는 말은 흔히 '식상하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이런 식상한 표현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조금도 새로울 게 없고, 듣는 사람으로부터도 그 어떤 감흥도 이끌어 낼 수 없기 마련입니다. 의사소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상대방에게서 감흥을 이끌어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색다름이 느껴지거나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대화의 묘미를 느끼게 됩니다.


종종 우리는 허튼소리를 잘하는 사람에게 '비싼 밥 먹고 웬 헛소리냐'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왕 말을 할 생각이라면 가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도 그 가치가 고스란히 전달되어야 하고요.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말이 말로써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치 있는 말을 하는 데 있어서 태생적으로 소질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을 조리 있게 하기는커녕 생각으로 떠오른 것조차도 말로 옮기는 게 쉽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침묵은 금'이라는 말처럼 유의미한 말을 못 할 바에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은 방법일까요?


어떤 면에선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더 현명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가급적이면 줄이고, 적재적소에서 반드시 필요한 말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말이 우리의 이미지에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다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란 건 지속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고 김춘수 시인은 그의 시 에서 이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자에게 부여된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 자체가 결국은 말하기입니다. 말은 해야 제대로 된 맛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하면 할수록 그 깊은 맛이 우러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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