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일 차.
이틀 전에 수능 시험이 끝나고 비로소 온 집안에 활기가 돌고 있습니다. 저는 거의 보지 않습니다만, TV를 틀어놔도 늘 볼륨은 1이었던 집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민감해 있을 때에는 아예 볼륨을 0으로 해놓고 등장인물들의 동작만 보곤 하더군요. 저럴 거면 굳이 왜 TV를 보고 있는 건가 싶더군요. 그럼에도 꿋꿋이 보고 있던 아내가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가끔 아내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아들이 외박을 나와 이런저런 말을 나눌 때에도 기본적인 톤은 '쉿'이었습니다. 모든 환경의 중심은 수능 시험을 앞둔 딸아이였습니다.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뜨거운 곳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던 집에 드디어 평화가 돌고 있습니다. 딸아이의 시험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3주는 기다려야 합니다. 나름 가채점은 했겠지만, 아직까지는 멘털 관리 차원에서 시험을 잘 봤느냐는 질문은 삼가는 중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먼저 얘기하지 않는 한은 그게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어쨌거나 본격적인 시험은 끝이 났으니 비교적 자유롭게 얘기를 하고, TV 볼륨 소리도 이제 제법 커졌습니다. 아침에 거실을 지나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네.'
그 빌어먹을 놈의 수능시험이라는 게 뭔지 참, 정상적인 가정을 절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놈의 위력에 또 한 번 혀를 내두릅니다.
1년을 이렇게 보냈는데, 재수라는 건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만, 자기의 꿈이 명확한 딸아이는 이번에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재수도 불사할 각오를 보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입니다. 부모인 우리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당연히 밀어줘야 할 겁니다. 지금으로선 아무쪼록 정시 결과가 잘 나와서 그나마 딸아이의 꿈을 이루는 데에 하나의 밑거름이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에게 휴가 아닌 휴가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아내도 저녁에 약속이 있고, 휴가를 나온 아들놈은 딸아이와 함께 오붓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군요. 오늘은 제가 무엇을 하든 터치를 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 오라고 했습니다. 으레 이럴 때면 그동안 못 마신 술타령이나 하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대고 그것도 아니라면 필드에 나가 함께 시간을 즐길 친구를 찾기 마련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술이라고는 맥주 반 컵도 못 마시는 제가 술친구가 있을 리가 없고, 세상의 그 어떤 스포츠 중에서도 골프를 가장 싫어하는 저로서는 필드에 나갈 일도 없습니다.
그래 봤자, 제가 갈 곳과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기어이 집 앞에 있는 파스쿠찌에 들어왔습니다. 늘 앉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2층에 와서 글을 쓰고 있으니 마음은 더 편합니다. 오자마자 소설 한 편을 썼습니다. 200자 원고지 19장의 분량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즐겨 마시는 바닐라 라떼 한 잔을 마셔가면서 소설을 쓰고 있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닙니다. 고작 신선에 그칠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이 정도면 신(神) 급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제 머릿속에만 들어 있던 몇몇 등장인물들이 제가 펼쳐 놓은 멍석 위에서 활개를 치고 다닙니다. 마치 줄이 달린 인형극을 시연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제가 설정한 그 인물들은 오직 저의 지시만 듣고 움직입니다. 인물들을 둘러싼 환경도 저의 손끝만 보고 있습니다. 단순한 나무 한 그루, 버스 한 대도 제가 움직이라고 해야 나타나는 격입니다. 아마도 어쩌면 이것이 소설을 쓰는 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1000일 글쓰기의 오늘 자 글인 이 글이 끝나면, 다시 조금 전에 썼던 중단편소설의 다음 회차의 글을 쓸 생각입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삶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라는 구절이 문득 떠오릅니다. 생각하고 커피 마시고 소설의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글 쓰는 삶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