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여유
사백 쉰 번째 글: 참 근사한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아이들을 하교시키자마자 의도치 않게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출장비가 지급되지 않는 출장을 달고 학교를 나섰습니다. 문화의 날이라고 1년에 네 차례 시행된 일인데, 이번이 올해의 마지막 행사입니다. 관내의 명소를 찾아가 문화적인 경험을 향유한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진행되는 행사입니다만, 곧이곧대로 시행될 리가 없습니다.
업무적으로 만나 같은 공간에 기거하는 처지로선 그런 걸 바랄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바야흐로 1인 시대입니다. 어차피 찰떡 같이 마음이 맞는 관계가 아니라면 이참에 개인 시간을 즐기는 게 더 현명한 건지도 모릅니다. 억지로 뭔가를 같이 하자고 하면 하기는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내켜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지인이 운영하는 어느 커피 전문점입니다. 몇 달 전에 작년 학부모님 한 분과 우연히 들른 곳인데, 커피 맛도 특이했고 풍광도 좋아 그 후로 두 번 혼자 왔다 간 곳입니다. 자주 오진 못합니다. 두어 달에 한 번씩 방문했습니다. 굳이 집으로 가는 반대 방향에 있는 이곳을 종종 들르는 이유가 있는 곳입니다.
매장의 앞문과 뒷문이 늘 열려 있는 곳입니다. 어떤 쪽이 앞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출입문을 기준으로 보자면 앞문쪽은 일본의 어느 조용한 시골 마을을 온 듯한 느낌을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말해 놓고도 우스운 건 정작 일본이라고는 가본 적도 없으면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겠습니다.
뒤쪽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시골의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 왔던 그날 매장 안에 앉자마자 한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별 것도 없는 이 풍광이 왜 이렇게도 눈에 밟혔을까요? 가끔 스타벅스 혹은 파스쿠찌에 가면 늘 이곳이 생각나곤 합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적지 않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이곳에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에 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커피 맛이 특이하다는 겁니다. 마치 특허라도 받은 듯 다른 매장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맛과 향을 지닌 커피를 이곳에 오면 마실 수 있습니다. 컵 가장자리를 따라 땅콩가루가 둘러 쳐져 있는데, 그 씹히는 느낌이 참 묘했습니다. 처음 온 날 마신 뒤로 올 때마다 저는 똑같은 것만 마시게 되더군요.
이런 제게 메뉴판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누군가는 매장에 오면 다양한 메뉴를 마셔 보는 게 좋다고 합니다만, 제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입니다. 메뉴의 이름도 방금 전에 물어보고 알았습니다. 막상 이래 놓고도 다음에 올 때쯤이면 메뉴의 이름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음료를 주문할 때 늘 먹던 것 주세요,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되니까요.
사실 이 매장의 사장님은 작년의 제 학부모님 중의 한 분입니다. 그때에도 어느 정도는 편한 분이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만큼 편한 관계는 아닙니다. 더는 아이의 담임이 아니라 그런지 이젠 예전보다 더 편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종종 손님이 뜸할 때 학교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더라도 부담감이 없어서 좋습니다. 어머님도 편하게 묻고 저 역시 편하게 대답합니다.
어머님은 손수 구운 빵까지 제가 앉은 탁자에 놓고 조리대로 갔습니다. 다른 손님들이 사용한 컵을 씻는 소리가 들립니다.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가 정겹게 귀에 와 감깁니다. 한참 전부터 뜻도 모르는 팝송 한 곡이 매장 안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하기 딱 좋은 타이밍입니다. 한 모금씩 마셔가며 글 쓰기에 제격입니다. 이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좋을 뿐입니다.
사진 출처: 글 작성자 본인이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