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8
비를 흩날리다가 바람을 세차게 부리다가 태양을 들이밀다가
하루종일 날씨는 책을 엄지로 넘기며 대충 읽는 독서 같았지
우산을 펴면 해가 뜨고 양산을 펴면 비가 오는
장난꾸러기 날씨는 무언가 말하고픈 계절의 투정이었어
몸에 애매한 핏감의 옷처럼 마치 빌려 입은 외투처럼 계절은 11월에 무엇을 걸쳐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는 것 같아
무엇이 제대로 되지 못한 이의 고충은 무형의 날씨에게도 비슷하게 드러나나 봐
한바탕 뒤척이고 나면 겨울로 안착하겠지
세상을 얼어붙게 하고 움츠리게 하고 어디론가 따뜻한 곳으로 모여들게 등을 떠밀겠지
거리의 사람들은 바쁘게 걸어가고
기왕에 떨어지는 잎들도 한 번 더 크게 텀블링을 하며 낙하하고
한 두 번 맞이하는 계절도 아닌데 어색하고 낯설구나
어제와 내일의 간극이 큰 요즘에는 날씨도 사춘기를 겪나 싶어
넘어가는 과정에는 파도가 일고 발걸음은 바쁘고 눈동자는 흔들리니까
계절의 나이테는 꼭 필요할거야
시기마다 감각의 나이를 키워야 지구에서 버텨낼 수 있어
내일은 올해 첫눈이 내린다는 예보야
왜 첫눈은 한 해 마지막에나 만날 수 있을까
아니지 왜 1월의 눈은 첫눈이라고 쳐주지 않을까
처음은 늘 기다린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주는 훈장인가보다
그런데 비는 조금 서운하겠네
첫비는 언제인지 안 챙기는 게 흥부네 마지막 자식 생일처럼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