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명언: 쌓고 쌓다 보면 글의 내공도 쌓일 겁니다.
사람들이 작가의 장애물에 봉착하는 이유는 글을 쓸 수 없어서가 아니다. 유려하게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 때문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애너 퀸들런이 한 말입니다. 매년 미국에서 언론과 문필 분야에서 뛰어난 대중적 공로와 업적을 지닌 사람에게 수여하는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쩌면 그녀의 말에 신뢰감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유려하게 쓸 수 없다는 것에 결코 절망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유려함을 갖춘다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여러 작가님들에게 글을 정말 유려하게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꼽아보라고 하면 세상의 모든 작가들을 거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누군가에게는 별로일 수도 있고, 더러 몇몇 사람들이 싫어하는 작가도 어떤 분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갈리는 게 당연한 것이라면, 우린 결국 유려하게 쓴다는 것 자체가 기준이 꽤 모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지금 우리가 글을 유려하게 쓰지 못한다고 해서 절망할 이유 따위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있다면 그(그녀)를 위해서 우리가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한 것입니다.
기준 자체가 모호한 글의 유려함이라는 건, 쉽게 갖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아닙니다. '그만한'이라는 말로는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할 수 있고 더러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이 '유려함'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냥저냥 평범한 글쟁이로 남게 될 소지도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글쓰기 그 자체를 좋아한다면 그냥저냥 평범한 글쟁이가 되면 어떻고, 또 몇몇 사람들에게만 울림을 주는 사람이 된들 어떨까요? 그 어느 쪽도 나쁠 건 없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면 글쓰기라는 건 충분히 달려들어 볼 만한 일이니까요. 아마도 언젠가는 저에게도 유려한 글을 쓰게 될 날이 오지 않겠나, 하는 긍정적인 바람을 가져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혹시 유려하게 쓸 수 없다고 해서, 혹은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절망할 이유 따위는 없다는 걸 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