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다섯 번째 글: 이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 내가 사는 대구인 것을 감안한다면 적게 오는 비라고는 가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국적으로 150mm 내외의 비가 예보되어 있는 데다 반갑지 않은 태풍까지 북상 중이라고 했다. 한동안 비는 피할 수 없으리라.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늘 이동 중에 글을 쓰다 보니 오른손엔 폰이 어김없이 들려져 있다. 게다가 오늘은 왼손에 우산까지 쥐어들었다. 두 손이 다 고정되어 버렸으니 뭔가 다른 행동을 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멈춰 서야 한다. 가다가 섰다가를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신발 주위에 물이 고인다. 아직 신발 안으로 물이 들어온 건 아닌데 어쩐지 발까지 흠뻑 젖어버린 듯한 기분에 얼른 발걸음을 옮긴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지?'
불과 며칠 전에 비라도 좀 내렸으면 좋겠다는 글을 썼고, 그날인가 바로 비가 와 기분이 너무 좋았다는 글까지 썼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간사할 수가 있는 건지? 낱말의 뜻은 대충 알지만 혹시나 해서 사전에서 찾아봤다.
간사하다: 바르지 못하고 간교하다.
아니, 이런? 단 한 번도 나는 나 자신을 간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꽤 괜찮다거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바르지 못하고 간교하다니……. 고작 비 하나 때문에, 졸지에 사람이 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간교한 사람까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냥 편의상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행동이든 생각이든 경우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걸 두고 간사하다고 말하면 될 것 같다고 말이다. 아전인수, 완벽히 자기 논에 물대기 격이다. 아침부터 바삐 서두르다 비까지 맞아 조금은 거치적거리게 된 데다 간사한 사람까지 되었으니 이 정도 합리화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 옷이 그리 많이 젖지는 않았다.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같이 학교행 버스를 타는 선생님이 비가 오니 택시를 타자고 해서 별 번거로움 없이 교실에 들어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적어도 오늘은 이렇게 비가 오고 있으니 덥지는 않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웬걸, 습도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온 자체가 높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몸 여기저기에 밴 습기가 슬슬 짜증을 돋우고 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은 서로가 조심하는 게 상책인데, 교실에 앉아 있는 27명의 아이들에게 고작 그런 것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가 없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때로는 저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그런다고 해서 하늘이 하는 일에 어찌 개입할 수 있을까?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또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늘 즐겁고 유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의 심성을 닮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