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변덕
일흔일곱 번째 글: 가을은 어디에 있는지요?
예전부터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기후라고 배워왔다. 전 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환경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말도 들었다. 1년 365일, 그리고 사계절,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각각 3개월씩 배정되어 있다. 일단 달력 속에 그렇게 철저하게 나뉘어 있고, 우리의 기억에서도 그러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성장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이 규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봄에는 따스했고, 여름에는 수박화채가 그리울 정도로 더웠으며, 가을엔 선선했고, 그리고 겨울엔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울 만큼 추웠다. 뭐랄까, 참 건강한 계절이었었다. 더울 땐 더웠고, 추울 땐 추웠다. 어린 마음에도 날씨의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어쩌면 각각의 계절이 주는 매력에 취해 다가오는 계절을 손꼽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여름이라고는 없는 나라에서 살다 온 사람들은 우리의 여름을 부러워했고, 겨울과 눈을 보며 신기해하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었다.
세상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돌아간다고 느끼는 요즘과 같은 때에 이만큼 공평한 것도 없었을 정도이다. 누구도 불평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인지 이 공평함마저 흔들리는 느낌이다. 명백히 달력에서 구분되어 있고, 우리의 인식 속에도 각인된 계절감이 점점 퇴색되어 가는 기분이다. 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봄과 가을이 다른 두 계절에 비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심지어 가끔은 아예 사라진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나라에는 사계절이 아니라 여름과 겨울만 있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나 할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의 계절은 이렇게 나뉜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인 것 같다. 봄 1개월, 여름 5개월, 가을 1개월, 그리고 겨울 5개월, 12개월 중 어느 한 달도 누락된 달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 두어 달은 어딘가에 뺏긴 기분마저 든다.
지금이 9월이니 절기상으로 보면 엄연한 가을이지만 과연 가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직 더위가 다 가신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어제와 오늘은 오히려 쌀쌀하다 싶은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느낌으로 보면 여름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말이다. 단지 느낌 탓일 수도 있고 여름 내내 들인 습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른 명 남짓 들어찬 대낮의 교실 안엔 여전히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다. 그렇게 보면 9월은 여름에, 그리고 11월은 겨울로 옮겨 간 게 확실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
아마도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는 표현을 이런 경우에 하면 될까? 완연한 가을의 한가운데에 이미 들어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어디에도 가을은 다가서지 않은 느낌이다. 딱 절반만 가을인 것 같은 느낌, 절반을 사이에 두고 저녁은 가을이었다가 다음날 낮이 되면 다시 여름으로 둔갑하는 요즘이다. 천고마비,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가을이라는 말도 다 옛말 같이 들리고, 독서의 계절 운운하던 것도 마치 그런 때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예전엔 그렇게도 싫어했지만, 이젠 이용의 노래만으로도 가을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0월의 마지막 밤 어쩌고 저쩌고 하며 그날만 유독 청승을 떨어대던 그때가 그립다는 얘기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이맘 때면 시려오는 옆구리의 허전한 느낌을 가져본 게 언제였을까? 어느새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옷깃을 여미던 그 감촉도 생각나고, 도로 위에 어지러이 널린 젖은 낙엽들을 보며 고독을 씹어도 조금도 흠이 되지 않는, 내가 알고 있던 그 가을이 그립다.
대개 그러하듯 모든 것은 그 나름다움을 갖춰야 한다. 여름이면 더워야 하고, 가을이면 선선해야 한다. 더운 것 절반, 선선한 것 절반인 지금이 그래서 전혀 반갑지 않다. 변덕스러운 이 날씨가 달갑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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