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세 번째 글: 왜 잘 나오던 TV가 안 나오냐고?
연휴 첫날이 되었다. 의외로 조용하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에 차들도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첫날인데도 이렇게 바삐 움직이나 싶었는데, 달력을 보니 내일이 추석이었다. 그러면 발 빠른 움직임이 이해는 된다만,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어보면 단 하루만 명절 분위기를 내고 나머지 날은 어떻게든 휴일을 즐기려는 심산이다.
굳이 나라에서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할 이유는 없어 보였는데, 뭐, 내수 진작이니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건 핑계 같다. 뭔가 좀 선심성 차원의 조치 같긴 하지만, 어쨌건 간에 휴일로 지정해 쉬라고 하니 나쁠 건 없겠다.
첫날이니 뭘 하지 하며 생각하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펼쳤다. 오늘은 뭐에 대해 쓸까 잠시 생각하고 있던 중 아내가 거실에서 나를 호출했다. 뭘 하고 있든 아내가 호출하면 무조건 달려가야 한다.
난데없이 멀쩡한 TV가 왜 안 나오냐며 고쳐보라 한다. 가끔씩 느끼는 것이지만, 아내와 살기 위해선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가 아니라 난 진즉에 맥가이버 손자쯤은 되었어야 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나 추진력 등에선 내가 감히 따라갈 수는 없지만, 특히 기계 쪽에서 문제가 생기면 아내는 어김없이 나를 호출한다. 셋톱박스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TV 채널이 왜 안 바뀌냐, TV 볼륨 소리는 왜 조절이 안 되냐, 아까까지만 해도 잘 나왔는데 왜 프린터 출력이 안 되냐 등등 기계적인 결함이 생길 때마다 아내는 세상에 둘도 없는 기계치인 나를 부르곤 한다.
아내와 나는 성격이 정반대이다. 아내는 언행일치의 살아 있는 표본에 가깝다. 반대로 나는 그렇지 못하다. 거짓말을 자주 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살다 보면 내가 뱉은 말이 실천에 옮겨지지 않는 날도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인데, 지금껏 아내와 살아온 22년 동안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아내는 성격이 꽤 급하다. 한 번 말하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에 비해 나는 느긋한 편이다. 쉽게 말해 밥 먹고 빈 그릇을 개수대에 담그는 동시에 바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이 내 아내의 스타일이고, 나는 커피도 한잔하고 잠시 쉬었다 설거지해도 되지 않느냐는 스타일이다.
자, 이제 이만하면 눈치를 챈 건지 모르겠다. 아내는 거실에서 TV가 안 나온다고 발을 동동 굴리고 벌써부터 난리가 났다. 자칫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나왔는데 왜 지금 나오지 않느냐며 기계적인 질문을 할 태세였다. 그러면 마치 난 어느 집인가에 파견된 A/S 기사로 빙의된 채 몇 개의 선을 꽂았다 뺐다를 반복한다. 또 TV나 셋톱박스의 전원을 켰다 껐다를 반복한다. 선을 뽑을 때마다 혹은 꽂을 때마다 쏟아지는 질문들, 정말 아내는 내가 A/S 기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느긋하게, 정말 느긋하게 이렇게도 해봤다가, 또 안 되면 저렇게도 해본다. 그때마다 아내는 고객센터에 전화해 봐라, A/S 기사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지만, 함께 오래 살아 본 경험을 비추어 보자면 이럴 때에는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내에게서 발송되는 모든 언어적 신호를 차단한 채) TV가 나올 때까지 다양한 시도를 해봐야 한다.
맞다. 아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면 그야말로 온 집안은 비상사태가 된다. 21살의 아들과 18살의 딸이 저마다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달려 나왔다. 방송 화면이 송출되지 않고 있는 TV 화면에 뜬 메시지를 사진으로 찍는가 하면 유튜브에 바로 검색해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한다. 역시 선만 뽑았다 꽂았다 하는 단순 반복 작업으로 시간을 때우는 나에 비하면 확실히 MZ 세대인 건 맞는 모양이다.
과연 누구의 공헌인지는 모르지만, 10여 분의 소동 뒤에 기어이 TV 화면이 나왔다. 아이들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온 마냥 저마다 스마트폰을 든 채 의기양양하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고, 그제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젖어 나 역시 내 방으로 간다.
연휴 첫날치고는 액땜 한 번 제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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