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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09. 2023

나의 정원은 어디에 있을까?

010: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으레 동화라고 하면 아무 글에나 종결 어미를 높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동식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말을 하게 한다거나 현실에선 볼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서 그저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되는 게 동화인 양 알던 때가 있었단 얘기입니다. 물론 동화가 이런 속성을 띠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한참 지난 후에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종종 성장 소설을 읽을 때면 이런 폐해를 엿보게 되기도 합니다. 성장 소설은 말 그대로 사람이 자라나는 과정을 이야기화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성인인 걸 감안했을 때, 이런 성장 소설은 이미 머리가 클 대로 커 버린 우리이지만 과거로 돌아가 향수에 젖어 지난날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는 즐거움 외에도 그 순진무구하면서도 무결점인 아이들에게서 현실 속의 우리들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일까요? 한때 성장 소설이 유행했던 적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즈음에 몇몇 성장 소설들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것은 어린아이의 시각인가, 어른의 시각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장 소설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린아이의 말투나 생각을 그대로 옮겨 올 필요는 없을 테지만, 지나친 애 늙은이의 관점은 작품을 읽는 이를 질려버리게 한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어떤 일에 대해 다분히 몰가치적인 사회와 다가치적인 사회로 양분되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이라면, 몰가치적인 세상에 사는 어린이들에게서 우린 보다 근원적인 성장 소설의 묘미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쉬이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주인공인 한동구 역시 그러한 인물에 다름이 아닙니다. 열 살이 다 되어 가도록 한글도 제대로 못 읽고 못 쓰는 난독증을 가진 아이, 다행스럽게도 터울이 많이 진 여동생은 두 돌이 되기도 전에 글을 척척 읽어내는 명민함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상황들 자체가 알게 모르게 동구의 존재감을 갉아먹는 일들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귀신은 뭐 하는 줄 몰라, 저런 사람 안 잡아가고……?'라고 말하기 딱 좋을 만큼 제멋대로인 할머니-책을 읽는 동안 '문디 할마시! 콱 뒈져버리지!' 꼭 저런 사람이 오래 산단 말이야,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와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 그 사이에서 외줄을 타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머니 속에서 동구가 마음 하나 뉘일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만나게 된 박영은 선생님.

     

사실 초등학교 때로 다들 한 번씩 돌아가 보면 그런 생각들을 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의 미모와는 상관없이, 몸짓 하나하나가, 또 말투 하나하나가 천사와도 같이 눈부셔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그런 선생님, 모르긴 몰라도 저 선생님은 보통 사람들처럼 오줌도 안 누고 트림도 안 하고 코도 안 후빌 것 같이 그저 고결해 보이기만 했던 그런 선생님……. 박 선생님은 동구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진실된 사랑이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동구라는 미성숙한 존재에게 처음으로 생각의 폭을 넓혀 주고 이성을 깨닫게 해 주고 세상을 바라보게 해 준 사람이란 것이겠습니다.

     

한편으론, 아직 세상에 눈을 뜨지 못한 동구, 가난은 차치하고라도 정서적으로도 늘 불안의 연속이었던 가정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눈물겹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뭐, 사실 그랬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마 저 같았어도 동구와 똑같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독스럽게도 까탈스러웠던 할머니와 온갖 비위를 다 맞춰가며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억눌려 살아가던 엄마와 이를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오히려 엄마를 닦달하고 두들겨 패기도 했던 무능한 아빠 사이에서 저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동구에게 사랑하는 두 사람의 죽음을 안겨 준 건 지나친 처사가 아니었을까요? 나이 차이를 무시하고 마음속에 꼭꼭 눌러 담아두었던 선생님의 행방불명에 이은 사망 소식, 터울이 많이 지는데도 불구하고 세상 그 어떤 남매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가 끔찍이도 위해 주었던 여동생 영주의 죽음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고난의 한 가지이며, 그런 고난이 한 인간을 보다 성숙하게 완성시켜 주리라고만 생각하기엔 너무도 가혹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주의 죽음 자체가 동구의 실수에서 빚어진 것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정원……, 가난하게 살면서 정원을 가진다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던 동구였습니다. 달동네와도 같은 곳에 살면서 쉼 없이 오르내리던 골목길 초입에 있었던 으리으리한 3층집에 딸린 바로 그 정원, 간간이 문이 열려 있을 때마다 몰래 들어가 이런 곳에 살면서 이런 정원을 가져 봤으면 하는 생각을 품게 했던 그 정원이, 동구만의 아름다운 정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박 선생님과 영주의 죽음을 겪고 나서 비로소 애 늙은이가 되어 버린 동구, 그 아이의 정원은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이게끔 느끼게 해 주었던 박영은 선생님이었을 테고, 결국엔 박 선생님을 향해 풋사랑을 피워나가며 자라났던 그 순수했던 동심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또 힘겨운 유년 시절에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 속에서 뒤틀려 버린 가족들을 다독여 주고 서로 화합하게 해 주었던 유일한 통로였던 영주의 존재에 다름 아니었을 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만의 정원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 셈이 되겠습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제법 빛이 바래긴 했어도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말입니다. 이젠 그 정원이 어디에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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