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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11. 2023

작품에 내내 흐르는 음악의 선율

011: 우미노 아오의 『해결사』를 읽고…….

우미노 아오의 『해결사』라는 이 책은 조금은 독특한 느낌을 갖게 해 줍니다. 작품 전반을 흐르는 분위기 내내 '헨델의 쳄발로 소곡 제7장 G단조의 파사칼리아'라는 음악을 생각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작의 제목이 『수상의 파사칼리아』라고 합니다. 아래에 제가 단 짙은 글씨들은 제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음악의 빠르기에 맞춰 표현해 본 것입니다.


Adagio …… 아주 느리고 침착하게     

책을 펴 들면서 먼저 조용한 호숫가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다이도지 쓰토무와 가타오카 나쓰가 눈에 띕니다. 어딘가 조금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 쌍의 커플, 부부라고 하기엔 통념상 나이 차이가 적지 않습니다. 동거 남녀건 연인이건 간에 타인들은 모두 그들을 부부라고 간주합니다. 해결사라는 제목에 걸맞은, 무슨 흥신소 직원이나 전문 킬러 같은 분위기를 아직 풍기지 못하는 쓰토무이지만, 적어도 그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는 행동거지나 일에 대한 철두철미한 맺고 끊음이 분명한 점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과거가 어땠을 거라는 식으로 그 어떤 의심이나 궁금증도 품지 않는 나쓰는, 쓰토무를 극진히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산책을 갔던 숲길에서 발견한 두 마리의 개 중에서 살아남은 케이트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기까지 합니다.     


Andante …… 느리게     

무슨 추리소설이, 그것도 아니라면 액션, 스릴러 물이 이리도 조용할까요? 잔잔한 비취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조용하다 못해 사뭇 고즈넉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추리물이니 뭔가가 있겠지 하며 마음속에선 단단히 준비를 하며 이제나저제나 하며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물론 이런 설렘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이런 설렘이 어쩌면 책을 읽는 작지 않은 즐거움이 아닐까요?       

잔잔하면서도 비슷한 유의 책에선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의 흡입력이 저를 강하게 빨아들입니다. 어느새 저 자신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비취호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물수제비라도 뜨기 전엔 미동도 없을 것 같은 그 고요한 정경이, 가슴속에 서서히 얇은 파문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Moderato …… 보통 빠르게       

시종일관 주인공의 독백과 회상 형식이 이야기 중간중간에 곁들여져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냉혈한이나 다름없던 벤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인 나쓰는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쓰에게 삶의 즐거움을 주었던 케이트를 치료해 주었던 마을의 수의사 다카하타와의 교류들……. 그 역시 아내와 아이와 헤어져 사는 처지라 외로움을 환락가에서 달래게 되고, 거기서 조우하게 된 벤과 더욱 친밀감을 느끼며 왕래합니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고요한 마을에 숨어(?) 살던 벤의 과거의 본능을 일깨우게 되는 일들이 조금씩 머리를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다. ☞ 본 책, 73쪽

     

아니나 다를까, 예전에 '해결사' 시절 때 같이 일했던 팀 동료들이 자신이 집을 비운 틈을 타 몰래 침입해 들어와서 만나게 되고, 그렇잖아도 슬슬 온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할 무렵이던 그때에 새로운 일거리 제의가 들어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의 유일하게 왕래하는 이웃이라 할 수 있었던 다카하타 수의사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뭔가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벤은 이제 서서히 자신이 어딘가로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에겐 평생을 두고 기억해야 할 말이 있다.
방심하면 실수를 부른다. 절대 흥분하지 마라. 항상 평정심을 유지한다! ☞ 본 책, 291쪽     


이제 그는 평정심을 유지한 채 범인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간의 휴가를 얻어 해결사의 새로운 일을 위해 떠납니다.     


Allegretto …… 조금 빠르게     

프라이팬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지금껏 충분히 기름을 둘렀으니 계란이든 냉동식품이든 그 위에 얹기만 하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기름을 튀길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제 마음도 스타팅 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멋진 남자, 벤-나쓰에겐 어디까지나 쓰토무였던 해결사-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면 될 일입니다. 친절하게도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담담한 어조로 설명해 주기까지 합니다. 조금의 어려움도 없습니다. 해결사라는 그 직업(?) 세계를 이해하긴 힘들더라도 그가 처한 심리적 상황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고, 또 그만큼 공감마저 갑니다.


Allegro …… 빠르게      

수상한 의뢰인의 가택 침입을 통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 철저히 사전 자료를 조사하고 해결사답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는 사건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애를 씁니다. 모든 해결사들이 이렇다면 폭력과 협박과 살인으로 얼룩져 있을 그들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씻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법 숨 막히는 전개와 치밀한 벤의 행동들, 가히 해결사, 아니 승부사다운 기질을 보이며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그만의 방식대로 해결해 나갑니다.


Vivace …… 빠르고 활발하게      

의뢰건 임무 완수! 드디어 벤은 모든 사건(?)을 해결했습니다. 추리소설에 걸맞은 무슨 살인-물론 있긴 했지만 벤과는 관계없는 그런 것들이었고 그나마도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지는 그런 모습은 없어서 읽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이라든가 뒤통수를 치는 듯한 반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시시하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는데…….            


Andante …… 느리게     

갑작스럽게 몸과 마음이 느슨해지려 합니다. 모든 사건이 이제 다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70여 쪽을 남겨 둔 상태에서 '아! 다 끝났구나!' 싶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어쩐지 이게 끝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좀 부족하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나름 헤피엔딩이려니 했더니 마지막 장에서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혹시라도 이 책을 읽을 누군가를 위해 비워두어야겠습니다. 이 이상의 반전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모든 사건들을 뒤엎는 치밀한 반전이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위해서라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Presto …… 매우 빠르게     

만약에 추리나 스릴러 물을 쓴다면 어떤 식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하게 해 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자신이 할 말을 나타내는 게 작가의 소명이긴 하겠지만, 불가피하게도 어딘가에서는 독자를 속이는 부분이 꼭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건 독자를 우롱하기 위한 속임수는 아닌 것입니다. 보다 더 스토리에 깊이 빠져들게 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셈입니다.     

치밀한 반전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비극을 동반한 헤피엔딩으로 모든 게 마무리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비극은 벤에게 닥친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Moderato …… 보통 빠르게     

다시금 이젠 릴렉스! 자, 이제 모든 갈등이 해소되었습니다. 더 이상 벤을 혼란에 빠뜨릴 일은 없습니다. 그에게 일을 의뢰했었던 오카노도, 이제 더는 해결사들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는 핫토리도, 한평생 벤의 피를 빨아먹다시피 하며 그의 인생에 깊이 관여해 왔던 시바도 그리고 그의 비서였던 사에코도…….          


Adagio …… 아주 느리고 침착하게     

초반부에 비교적 느슨하면서 릴랙스 한 서술에서 어느새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는 듯 속도감을 느끼며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우선은 가쁜 숨을 한 번 몰아쉬면서 다이도지 벤(쓰토무)과 가타오카 나쓰의 사랑을 느껴봅니다. 그들의 추억이 묻어 있는 '헨델의 쳄발로 소곡 제7장 G단조의 파사칼리아'를 다시 듣습니다.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이 책의 진가는, 그리고 그 평가는 역자의 말에서 인용해 보면 가장 적절할 듯 보입니다.


솔직히 이 책을 번역하기로 결정하기 전 검토 의뢰를 받고 책을 펼쳤을 때 정말 헉! 소리가 나왔다. 원서의 빽빽하고 자잘한 글씨 때문에 읽기도 전에 살짝 질렸기 때문이다. ……(중략)…… '해결사'는 내게 '사랑'이 되었다. 읽는 관점에 따라서는 연애소설도 추리소설도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어떤 장르라고 단정 짓지 않고 읽는 편이 이 소설을 좀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읽는 내내 알싸함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고 책장을 덮고도 긴 여운이 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 ☞ 옮긴이의 말 中에서, 본 책 394쪽     


두 사람의 한 때 보금자리였던 비취호에서 생전의 나쓰가 그렇게도 아꼈던 애견, 케이트와 함께 들었던 그 음악 '파사칼리아'를 들으며, 떠나간 나쓰의 재를 뿌리며 그녀를 보냈던 것처럼 저 역시 나쓰와 벤을 그렇게 보내려 합니다. 잠시 제 마음속에 두 사람이 머무는 동안 적지 않은 행복을 느끼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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