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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12. 2023

시인은 노래한다.

012: 정병근의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를 읽고……

시는 참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시집을 볼 때마다 그 생각에 젖게 됩니다. 단 한 번이라도 시집 속에 있던 시를 온전하게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싶습니다. 삶의 굴곡이 그다지 요란하지 못했던 탓이었을 테고, 지금껏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건만 어쩌면 아직도 생에 대한 생각들이 무르익지 못한 탓이겠습니다.


어쩌면 저만의 착각일까요? 분명 이십 년 전보다는 시어가 확실히 어려워진 느낌입니다. 글자 하나하나에, 어절 하나하나에, 그리고 문장 하나하나에 온통 수수께끼가 배인 기분마저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무턱대고 미화시키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아 보입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는 듯 무턱대고 예쁘게 꾸미려고 혈안이 되어 있진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시어는 어려워도 읽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차 한 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 시인이 내다보는 세상의 깊이를 가늠하며 몇 번씩 고개를 끄덕이면 되었다고나 할까요?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아래의 글처럼 이 시집 한 권을 멋들어지게 요약할 수 없다는 것이겠습니다.      


정병근의 시는 시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의 미망과 쓸쓸함을 적막하게 점묘하고 있는 한편 회상과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는 흘러간 자아 혹은 시간과 대치하고 있는 현재적 자아와 불화 속에 녹아 있는 생의 의식을 고단한 모습으로 형상화시킨다. ☞ 해설: 「시간의 내부와 자아성의 회복」中에서, 본 책 98쪽     


존재의 미망……, 흘러간 자아와 현재적 자아……, 불화 속에 녹아 있는 생의 의식……, 그리고 고단한 모습으로의 형상화……. 정말 이만저만 고단한 정신의 작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직히 본 시보다 해설이 더 어렵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시집 한 권 읽고 저의 무지함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 그다지 달가울 리 없습니다. 그래서 작품 비평은 비평가에게 맡겨두려 합니다.


전 정병근 시인의 솔직함이 마음에 듭니다. 최근에 읽어 본 몇몇 시집들이 전반적으로 그랬지만, 아닌 걸 맞다고 우겨대는 우를 범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쩌면 현대 시인으로서의 중요한 자질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다소 삶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듯 보입니다.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모든 것이 비뚤어진 이 세상에 회의적인 시선을 좀 갖고 있다고 해서 크게 문제시될 건 없을 터입니다. 더군다나 이들의 약간은 비뚤어진 사물에 대한 시각들이, 사물 그 자체가 비뚤어져 있다고 보진 않는다는 걸 알기에 이 정도의 편협함은 오히려 제 삶에 있어서도 충분한 자극제가 됩니다.     


아무도 그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현관 바닥에다 팽이를 돌려대는 아이들에게나 큰소리치지만
아이들도 벌써 다 알고 있다
스스로 제복 입고 완장 차고 금테 모자 쓰고
불어도 안 불어도 그만인 호루라기를 가졌다
……(중략)……
관리하는 아파트는 한 동에서 세 동으로 늘었음에도
그의 집은 단 한 평도 늘지 않았다
……(중략)……
권력은 검은색에서 나온다고 믿는 듯하다
아침 일찍 검은 주인들의 차가 나갈 때마다
시키지도 않은 거수경례를 척척 붙인다
그는 점점 늙어 갈수록 더 화려한 제복을 입고
가슴에는 번쩍이는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누군가를 향해 씩씩하게 거수경례를 붙이고 싶다 ☞  「늙은 관리인」, 본 책, 32~33쪽      


아파트 관리인 이야기입니다. 관리비를 줄이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CCTV를 달면서 경비원들을 감원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그 생활의 편의성이 빚어진 하나의 웃지 못할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합니다. 권력이란 것 자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완장-혹시 아주 오래전 MBC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방영되었던 “완장” 편이 기억나시는지요? 제가 알기론 조형기 씨의 TV 데뷔작이었던 그 프로그램 말입니다-과 호루라기는 그에게 막강한 파워를 안겨 줍니다. 아무도 쫄지 않는 그런 상황이 못내 서글프고 결국엔 근원 없는 권력은 더 큰 자본이란 권력 앞에 머릴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검은색에 복종하는 그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터득한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들, 적어도 이 시 한 편 정도는 이해하는 데에 그다지 무리가 없었지만, 세상을 보는 시인의 너무도 솔직한 시각은 저의 마음을 기어이 불편하게 만듭니다.     

      

아내의 아파트에는 나와 아내와 아내의 아이들이 함께 산다
……(중략)……
아내의 아파트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녀가 깎아주는 노란 참외를 먹어야 한다
……(중략)……
더 있다, 아이들 등살에 모서리들마다 닳고 닳은
문갑이며 장식장인들 어찌 바꾸고 싶지 않을까
기어이 삐져나온 비닐 소파의 옆구리를 감추려고
큰 타월로 그럴싸하게 감싸놓은 그 엄청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누가 오기라도 하면 아내의 신경은 온통 거기로 가 있다
……(중략)……
아내의 아파트에는 나와 아내와 아내의 아이들이 함께 잔다
나는 침대에서 홀로 자고
아내는 양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품고
방바닥에서 씩씩하게 누워 잔다 ☞「아내의 아파트」, 본 책 60~61쪽   


분명 이 시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 가족임에 틀림없습니다. 시 속의, 나와 아내와 아이들. 하지만 그렇게 표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와 '아내'와 '아내의 아이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마 아내가 나 몰래 아이들을 낳았을 리는 없을 테고…….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내의 아이들'이라고 했을까요?

     

아마도 이런 풍경쯤은 쉽게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남편 말고는 모든 남자를 무서워하는 여자와, 자신의 아내 말고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남자가 그려내는 일상을 말입니다.

표면적인 가족의 테두리가 정서적인 가족의 테두리를 보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실내 장식에서 어떤 것 하나만 빼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모습을 그려보면 어떨까요? 바로 그렇게 빠져야 할 그 하나가, 남편이고 작품 속의 ‘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정쩡한 모습이 마지막 네 행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내가 같은 방에서 자고 아이들이 따로 한 방에서 자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이겠지만, 여기선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팔은 둘밖에 없으니 남편인 '나'가 갈 곳은 없게 됩니다. 이런 걸 혹시라도 서글픈 가장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될까요?      


시인은 노래합니다. 노래하라고 누군가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끊임없이 노래하곤 합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결국엔 인간만이 살 길이라고 말입니다. 그 끊이지 않는 노래가 비록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 시인이 제게 불러주는 노래가 아니더라도 저는 그의 노래를 들어야 합니다. 분명 언젠가는 그의 내면에서 나온 시어들이, 그가 불러주는 노래가 제 가슴속 깊은 곳에서 크게 울리게 될 날이 올 것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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