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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11. 2023

형과 여동생

아흔아홉 번째 글: 얼굴은 기억에 없습니다만.

저에게는 얼굴도 모르는 형과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있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지금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형과 제가 터울이 세 살 지고, 여동생과 제가 세 살 차이였다고 합니다. 물론 생전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얘기입니다.     

원래 저희 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믿음이 투철했던 어머니가 결혼과 함께 불신자였던 아버지를 전도하셨고, 어쨌거나 그런 환경에서 자란 저는 모태신앙에 태어나자마자 목사님께 안수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제 이름도 그 목사님이 지으셨고요.


그 시절(1970년대 초반) 으레 그랬듯 저희 집도 상당히 가난한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어지간한 감기에 걸려도 약을 사 먹으러 갈 돈이 없었다고 하니까요. 당연히 저에게는 기억에 없는 얘기입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당시 네 살이었던 형과 함께 앓아누웠습니다.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 형은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형이 그렇게 가자마자 아버지는, 하나님은 없다고 천명하시면서 교회를 뛰쳐나왔습니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줄곧 기도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살아남은 저라도 끝까지 생존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던 제가 네 살 때 얼마 전에 태어난 여동생과 함께 마찬가지로 또 앓아눕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짐작하시겠지만, 저만 남겨 두고 여동생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희 어머니가 그때 정신이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어머니 역시 믿음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수 년 뒤에 제가 신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부모님과 대치 상황이었을 때 비로소 어머니에게서 듣게 된 얘기였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 집에 있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널 신학교에 보내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게 믿음이라는 측면에서는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동생마저 떠나보낸 어머니는 두 번이나 지독하게 앓은 어린 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새끼라도 살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동생이 죽자마자 아직 열도 덜 떨어진 저를 업고 그 어려운 살림에 병원을 전전했다고 합니다.


그때 한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얘는 아마 평생 못 걸을 겁니다. 그리고 키도 1m 이상은 안 클 겁니다.”

그런 저주 아닌 저주를 들었을 때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런 말 요즘과 같은 때에 하면 되겠지만, 하나 겨우 남은 자식이 그 당시로서는 속칭, 병신이 되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그 의사의 예언 중 하나는 얼추 들어맞을 뻔했습니다. 저는 무려 4살 때까지 기어 다녔다고 합니다. 걷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두 발을 딛고 서지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저보다 세 살 어린 이종사촌 동생이 돌이 되기 직전에 곧게 선 것을 보고 어른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그때까지 기어 다니고 있던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벌떡 일어나 동생을 밀치고 처음으로 두 발을 딛고 섰다고 합니다. 그때의 모습이 제 기억에는 없지만, 아직 돌도 안 된 동생이 엎어져 울고 있는데도 이모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한 번은 어머니와 시장을 가는데, 어머니께서 이러시더군요.

“저기 저 병원 보이나? 저 병원에 니 못 걷는다 캤던 그 원장이라는 사람 있는 데다. 우리 함 쳐들어가까?”


제 키는 성인 남자 중에서는 아주 작은 키에 속합니다. 왜 이렇게 작으냐고 물었더니 언젠가 어머니께서 그러시더군요. 그 원장이라는 작자가 한 말을 생각하면 커도 정말 많이 큰 거라고 말입니다. 하긴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의학적인 근거에 따라 진단한 결과보다 무려 60cm나 더 컸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저에게 별다른 신체적인 이상이나 질병 같은 것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의식적으로는 전혀 기억하지 못 하지만, 어쩌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인지, 그때의 충격적인 경험(아무리 제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은 저를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심지어 저에게 그렇게도 무뚝뚝했던 아버지라는 사람은, ‘차라리 니가 죽고 너거 형이 살았으면 좋았을낀데’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하던 양반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4살 때 죽은 형, 제가 4살 때 죽은 제 동생, 그리고 평생 걸을 수 없다던 예언을 깨뜨리고 비로소 4살 때 걷게 된 저, 지금 생각해도 저는 왜 4라는 숫자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이젠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계시고, 그야말로 저는 천애의 고아에 형제자매도 없는 외톨이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때 만약 제가 태어나자 않았더라면, 형이 혹은 여동생이 죽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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