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곱 번째 글: 저도 해외여행 가고 싶어요.
아내가 일본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아내에겐 태어나 처음 가는 해외여행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지인들에게, 50년 넘게 살면서 여태껏 외국도 한 번 못 가 보고 뭐 하며 살았냐는 질문을 많이 듣곤 합니다. 그런 얘기가 들려올 때마다 본의 아니게 저는 죄인이 된 기분이 듭니다. 오죽하면 요즘은 마실 갈 정도로 자주 가는 곳이 해외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나마 제가 아내에게 덜 미안한 생각이 든다면 저 역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국에 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도 한 번도 못 가 봤으니 너도 못 가는 게 당연하다'는 그런 유치한 생각으로 저를 합리화하려는 건 아닙니다.
-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꼭 그런 심리가 작용한 건 아니라고 해도 이 지극히 단순한 사실은 저에게 하나의 면죄부가 되어 주곤 했습니다. 결국 그건, 시쳇말로 별 볼 것 없는 저한테 시집와서 22년 동안 고생만 했다는 걸 제간 안다는 의미였고, 앞으로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언젠가는 함께 가자는 일종의 다짐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아내가 먼저 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걸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거의 15년 이상을 함께 지내온 이웃들과 함께 가는 것이니 뭐라고 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주 왕래도 하고 남자들이나 아이들의 근황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관계들입니다. 여자들끼리는 각자의 집에 수저가 몇 벌 있는지도 알고 있을 정도인 그런 사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타국으로 간다고 해도 그다지 걱정할 이유도 없는 셈입니다.
뭐라도 하긴 해야겠는데, 하며 며칠 동안 고민 아닌 고민을 했습니다. 하다 못해 짐이라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더니 제가 나가면 같이 가는 아줌마들이 뻘쭘해할 거라며 손사래를 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조심해서 잘 갔다 오라는 말만 하기엔 뭔가가 식상하고 너무 성의 없어 보입니다. 성의를 표현한다는 게 무조건 금전적인 걸 뜻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금일봉을 준비해야겠다고 가닥을 잡습니다. 저도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처지다 보니 형편이 그리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네 사람이 식사 한 번 할 정도의 돈을 찔러주었습니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니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하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살다 보면 뭐든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럴 때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해외여행만 해도 그랬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22년 전, 신혼여행 문제로 여행사에 들렀을 때입니다. 당연히 우리도 해외로 나가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사에서 해외 상품은 굳이 권하지 않겠다는 말부터 꺼냈습니다. 하필이면 그때 오사마 빈 라덴이 한창 전 세계를 상대로 테러를 일삼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라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특히 몇몇 나라들은 아예 안전 자체를 보장할 수 없으니 기어이 가야겠다면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가야 한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보며 굳게 약속했습니다.
"이번만 기회가 아니잖아? 우리 이번엔 제주도 가고, 나중에 시간 내서 해외여행 가 보자!"
그때만 해도 우린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안 믿겠지만, 그 신혼여행이 우리 둘만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22년이라는 세월이 우리 둘의 사이를 얼마나 떨어뜨려 놓았는지, 이젠 두꺼운 벽 하나가 두 사람을 단단히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오늘 나 혼자 가서 미안해. 우리 다음에 꼭 한 번 같이 가자."
물론 '같이'라는 이 말에는 분명히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 그래도 전 압니다. 오늘 새벽에 아내가 제게 남긴 말도 결국엔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소 닭 보듯 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여행이라니, 그것도 보통 마음으로는 떠날 수 없는 해외여행이라니, 하는 생각만 들뿐입니다.
그나저나 한 번 나갔다 온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해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려 한다는데 걱정입니다. 저야 뭐, 그 맛을 아직 모르니 웬만해서는 어느 날 잘 있다가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며 설치진 않겠지만, 아내가 또 가겠다고 설레발을 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걱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