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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Oct 16. 2023

여행 후 이별 (part. 2)

백열 한 번째 글: 제 리즈 시절 이야기입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현주는 제게 꽤 노골적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아마도 그때에는 ‘친구 애인이라서 나한테 무척 잘해주는구나!’라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현주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뭐, 그런 식입니다. 언제 왔는지 모르겠는데 눈을 떠 보면 몇 미터 앞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지금의 방식으로 말하면 그녀는 밀당의 천재였습니다.


솔직히 그때를 돌아보면 그런 상황이 싫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 하게 된 연애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만난 사람이었으니 물불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미영이를 만나고 난 후 집에 들여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현주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린 친구의 친구로 만나는 거야, 알겠지?”

현주는 저를 만날 때마다 이 말을 저에게 했고, 마찬가지로 너네 뭐냐, 하며 미영이가 현주에게 물으면 매번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일명, 남사친, 여사친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전 낮에는 미영이를 만나고, 밤에는 현주를 만나도 그게 바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미영이도 저와 현주의 관계를 용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전 굳이 현주를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식이 되었든 미영이는 저의 연인이었고, 현주는 그런 연인의 친구였으니 제가 굳이 현주를 멀리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나 할까요?


언젠가 현주가 저에게 희한한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특정한 노래(원미연의 '이별여행')가 들리면 현주가 저에게 삐삐를 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분 안에 서로 전화 통화를 하자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냐고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별 뜻 없이 그렇게 하자,라고 하며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라디오나 TV 등에서 원미연의 “이별여행”이 들려옵니다. 그러면 현주가 저에게 삐삐를 칩니다. 그러면 그 삐삐를 받고 제가 삐삐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면 현주와 통화가 됩니다. 저는 그냥 장난 삼아 그러나 보다 싶었는데, 정말 원미연의 노래가 들린다 싶으면 곧바로 삐삐가 날아왔습니다. 삐삐를 받자마자 삐삐에 적힌 번호로 제가 전화를 걸면 현주와 통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린 만날 약속을 합니다.

아, 이건 여담입니다만, 지금도 원미연 씨의 '이별여행'을 들으면 현주가 생각납니다. 물론 미영이도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마 현주와 저는 단 한 번도 원미연의 노래를 흘려들은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도 모르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원미연의 노래가 나오면 중간에 내려야 했습니다. 내리려고 문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삐삐가 울립니다. 그러면 저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공중전화부터 찾습니다. 심지어는 학교 강의를 듣다가도 잠시 빠져나온 적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건 제가 미영이를 만날 때와는 또 다른 뭔가를 느끼게 해 준 일종의 이벤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을 맞아 제 연인이었던 미영이가 고향인 섬으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6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무려 두 달 반이라는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20살에 불이 붙은 관계인 데다 하루도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그건 우리에게 거의 이별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미영이와 전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부둥켜안고 부두가 떠나가라 울었습니다. 그때는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그냥 이대로 보내면 두 번 다시는 미영이를 연인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배 승선 시각은 점점 다가오고, 빨리 승선하라는 안내 방송에도 미영이와 저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함께 그 자리에 미영이를 배웅하러 갔던 미영이의 미용학원 남자 동기생 두 명이 저희를 억지로 떼어냈습니다. 그때 현주가 미영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미영아! 걱정하지 말고 잘 갔다 와! **이는 아무도 못 가게 내가 잘 지키고 있을게.”


저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미영이가 두 달 반 뒤 다시 돌아왔을 때 저는 더 이상 미영이의 연인이 아니었습니다. 미영이가 없던 그 틈을 타 저를 채간 사람이 바로 현주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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