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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18. 2023

이별 후 여행 (part. 6)

백열 일곱 번째 글: 저의 리즈 시절 이야기입니다.

1박 2일 여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소 이른 시간에 대구에 도착한 현주와 저는 달리 갈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 카페라도 가서 커피나 마시자는 말도 저는 할 수 없었고, 점심조차 건너뛴 현주도 어딜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아마 그렇게 30분은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늘 그랬듯 우리에게는 마지막 코스가 남아 있었습니다. 현주를 집에 안전하게 바래다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걷지 말고 버스 타고 가자. 나, 다리 아파!”

저와 있으면서 그렇게 먼 거리를 걸어 다녔어도 단 한 번도 다리가 아프다고 한 적이 없던 현주였습니다. 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현주가 사는 동네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정류장에서 현주 동네까지는 버스로 불과 20분 정도 거리였습니다. 마치 미리 그러기를 작정이라도 한 듯 현주와 저는 버스를 타서도 뚝 떨어져 앉았습니다. 앞쪽에 빈자리를 보자마자 현주는 덜컥 앉아 버렸고, 옆에 서 있으려던 제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던 현주를 보며 저는 뒤에 남은 몇 자리 중의 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같은 버스 안에 탔어도 서로 떨어진 거리에 앉았으니 내릴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현주가 사는 아파트까지는 5분 정도 걸립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짧아 보이던 거리가 그날따라 왜 그렇게 짧게 느껴졌을까요? 전 그때 분명히 현주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나를 내버려 뒀으면 적어도 미영이는 잃지 않았을 거 아니냐고, 그랬다면 미영이는 미영이 대로 내게 남아 있을 것이고 너 역시 내게 좋은 친구로 남지 않았겠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저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바보스럽게도 전 그 순간에도 주머니 속에 든 반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이내 아파트 입구에 섰습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해야 할지,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지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마음속에 있던 대로 넌 참 나쁜 여자라는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문득 아파트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리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남자답게 그냥 이대로 돌아서는 게 제일 폼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고, 혹시 그렇게 제가 돌아서서 가면 한 번쯤은 현주가 저를 붙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5분만 기다려 줘. 나 너한테 꼭 줄 게 있어.”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마 5층으로 알고 있던 현주의 집에 들렀다 나오는 데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손에 꽤 두툼한 종이 쇼핑백이 들려 있었습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물어볼 이유도,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커다란 곰인형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와 함께 어딘가로 여행을 갔다가 사격 게임을 했는데, 거의 만원에 가까운 돈을 들여 기어이 쓰러뜨려 제 것으로 만든 인형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현주에게 준 것 중에서는 가장 큰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인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려니 제가 못 알아볼 만한 물건들에 대한 설명을 잊지 않습니다.

“이건 엄마가 그때 시장에 같이 갔을 때 나 입으라고 사 주신 거야. 엄마한테는 꼭 죄송하다고 네가 대신 말씀드려 줘.”

단정한 원피스였습니다. 엄마도 그런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핫팬츠만 주로 입던 현주를 보며 엄마가 사 주신 옷인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한 번 하지 않았던 현주였습니다. 제가 현주를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엄마에 대한 각별한 정이 있었던 걸 보면, 어릴 적 엄마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자란 탓인 듯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한테 받은 선물은 어떻게 해?”

“굳이 그것 때문에 다시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어. 그냥 버려. 난 괜찮으니까.”


전 그때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현주를 붙들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현주에게 주기 위해 맞춘 반지였으니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그 반지는 현주에게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주야, 이거!”

현주는 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딱 그 정도의 통이라면 안에 뭐가 들었을지 바보가 아니라면 알 테니까요. 받자마자 현주는 통을 열었습니다.

“이쁘네. 네가 골랐어?”

“응, 그래. 너 주려고 며칠 전에 샀어. 이건 현주 네 거야!”

현주는 저보고 센스가 늘었다며 잠시 밝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네 성의는 고맙지만, 그래도 이제 이 반지는 내가 주인이 아니야.”

“너 주려고 산 거야. 헤어져도 이 반지만큼은 네가 받아줬으면 좋겠어.”

“아니, 난 받을 수 없어. 차라리 그러면 미영이 갖다 줘.”

현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영이에게 반지를 갖다주라고 말했습니다. 그건 마치 저보고 이제 자기와는 끝났으니 반지라도 들고 미영이에게 가서 싹싹 빌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얼핏 들으니 미영이 아직 너한테 미련이 있는 것 같거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분명 그 반지는 현주가 받아야 할 반지였다고 전 생각했습니다. 만약 끝내 현주가 받지 않는다면 반지가 갈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습니다.

“잘 가. 그동안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해.”

멋쩍게 악수를 한 우리는 그 길로 헤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제 기억은 완벽히 끊어졌습니다. 다만 딱 두 가지만 기억이 납니다. 한 가지는 2시간 조금 넘게 그 거리를 현주와 제가 늘 그랬듯 터덜터덜 걸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다 큰 남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 내어 울면서 그렇게 걸어왔습니다. 아마 눈물이 중앙로쯤까지 왔을 때 멈췄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거의 1시간 반 동안 울면서 왔던 것이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 사람 왜 저러냐, 하며 쳐다 보아겠지만, 고작 그런 시선이 신경 쓰였을 리 없었습니다.


두 번째 기억은 반지입니다. 그 와중에도 현주의 말처럼 미영이에게 반지를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갖다 드리는 것도 영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반지를 볼 때마다 현주와의 일을 떠올리게 될 테니 말입니다. 현주와 제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그 노래, 원미연의 “이별여행”처럼 결국엔 이별여행이 되어 버리고 만 울산에서 현주가 태화강을 넋 놓고 바라봤던 것처럼 저 역시 아양교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으니 다리 위를 도보로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지를 꺼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잘 고른 반지였습니다. 제 손가락에 밀어 넣어보았습니다. 들어갈 리가 없었지요. 전 반지를 주먹 안에 그러쥐고 제 시선이 가 닿는 최대한 먼 곳까지 던졌습니다. 태풍의 영향에 비까지 오고 있었으니, 게다가 그 작은 반지가 제 눈에 띌 리는 없었습니다. 저는 반지가 제 시선 아래로 지나갔을 거라고 여겨질 때쯤 다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저녁은 먹었는지, 엄마는 저에게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그렇게 지쳐 쓰러지듯 엎어졌다는 것까지는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3주쯤 지났을 때였을 겁니다. 미영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동안 집으로 전화를 하지 않았던 미영이 입장에서는 상당한 용기를 낸 셈이었습니다.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교회는 다니고 있다고, 다만 교회를 옮겼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제가 현주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원래 다니던 교회에 다닐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어 교회를 옮긴 것입니다. 물론 그때 미영이는 아직 고향에 있을 때였습니다. 미영이 말은 그랬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헤어졌어도 믿음은 버리면 안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컷 고향 갔다 와 보니 제가 보이지 않아서, 그 일 때문에 교회까지 그만 다니게 된 건가 싶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전화를 끊기 직전 미영이는 할 말이 있다고 한 번만 만나자고 했습니다.


무슨 기대를 한 건 아니었습니다. 네, 순수하게 말하자면 그냥 그 얼굴이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서문시장으로 가는 대로변 신호등 앞에서 우린 마냥 서 있었습니다. 한참 가만히 있던 미영이 입을 열었습니다.

“너 그렇게 가고 나서 나 한 달 동안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어.”

“미영아, 미안해. 내가 너한테 무슨 할 말을 하겠니?”

“들었어. 현주와의 일.”

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현이 딱 그때 알맞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하필 그때 나도 네 옆에 없었고 말이요. 지금이라도 네가 돌아온다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왕복 10차선 정도의 대로변이었을 겁니다. 오고 가는 사람도 많고 차량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곳에서, 그것도 몇 미터만 가면 대구에서 제일 큰 서문시장 근처에서 전 미영이에게 뽀뽀했습니다. 미영이는 그냥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습니다. 한 번 가볍게 안아주고 저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을 건넸습니다.

“미영아.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지금이라도 돌아와 달라고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어쨌거나 우린 헤어졌어. 넌 네 길을, 나는 내 길을 는 게 맞다고 생각해.”

미영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신호등이 바뀌면 바로 건너갈 생각이었고요. 신호등이 언제 바뀔까 싶어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어 바라보는데, 미영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거기까지여야 했습니다.

“나 많이 사랑해 줘서 고마워, 미영아. 이런 말 해서 너무 염치없지만, 나도 너 너무 사랑했어.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제가 미영이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한참을 걸어가다 뒤를 돌아봤을 때에도 미영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그해 11월, 재수학원에 등록했고, 바로 그다음 해에 교대에 입학했습니다.

무려 3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누구를 탓할 일이겠습니까? 가장 어리석었고 나쁜 사람은 저였습니다. 친구들은 현주가 정말 나쁜 X이라고 했지만, 그런 꼬드김에 넘어간 건 저였으니까요.

솔직히 현주는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영이는 한 번씩 생각이 납니다. 더군다나 미영이는 지금도 어디에서 살고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알고 있어서 큰마음먹고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은 들긴 하지만, 제가 정신이 그나마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될 거라는 걸 잘 압니다.

다만 언젠가 제가 나이가 들어서든, 아니면 병에 걸려서든 죽는 날을 받아둔 상태라면 한 번은 찾아가 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렇게 찾아간다면 수십 년이 지나 소용없는 일이라고 해도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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