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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지나 아침을 건너 오후를 돌아 방금 도착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내게 와 주어 고맙다.
날마다 다른 얼굴을 가진 것이 신기하다.
저녁의 표정은 밤으로 겹쳐져 온전하게 제 모습을 보기 어렵다.
퇴근길과 잠자리 사이에서 나름의 분주한 경계에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저녁 중에서도 여섯 시에서 일곱 시로 넘어가는 표정이 가장 설렌다.
설레는 마음은 라디오가 잘 부추긴다.
세상의 모든 음악
배철수의 음악캠프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즐겨 듣는 저녁의 라디오 프로그램들이다.
주파수만 맞추어도 감성은 출렁거린다.
세 명의 디제이들은 모두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나른한 목소리, 활기찬 목소리, 허스키한 목소리 모두 듣는 즉시 과거 저 멀리로 나를 던져놓는다.
여기에서의 과거는 물리적인 시간의 되돌림이 아닌 공간 없는 시간이다.
꼼짝없이 음악이 몸으로 스며들면 이내 어쩌지 못하고 귀를 라디오에 붙박게 된다.
먹을 갈아 시를 쓰고 싶어지고
새소리를 녹여 노래를 짓고 싶어지고
구름을 얇게 펼쳐 편지를 쓰고 싶어지고
저녁은 하루를 고이 접는 시간이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저녁은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저녁의 위로는 놓치지 않고 귀담아듣는다.
저녁을 흥청망청 보낼 수가 없다.
그러고 나면 헝클어진 이부자리를 집으로 돌아와 보는 불편함이 있다.
하루 중 저녁이 있어서 참 좋다.
저녁은 누구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다.
적절하게 지치고 적절하게 다지는 마음은 저녁에 가장 아름답게 숙성된다.
내일의 다짐이 서툴지 않고 오늘의 반성이 섣부르지 않은 저녁이 하루의 8할이다.
저녁을 알뜰하게 맛본다.
곧 밤이 저녁을 시샘해서 덥칠 것이다.
저녁을 되새김질하다가 내일 이른 새벽까지 소화시킨 후 오후쯤 서서히 뱉어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