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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22. 2023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

028: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읽고……

『가시고기』는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보다 더 신파적일 수 없는 작품입니다. 더 이상 슬플 수 없는, 그래서 읽으면 그 문맥을 따라 가슴이 뭉클해져 이내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게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문제들 속에서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표현하는 감정의 면면들은 우리 자신을 보다 풍성하게 해 주기도 하고, 때론 비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눈물이라는 것도 양자를 다 가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문학을 통한 눈물, 즉 슬픔이라는 카타르시스의 경험은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바탕 눈물바다가 되어도 각자에게 안겨진 삶의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거나 하진 않습니다. 다만 잠시 동안의 위로가 되긴 합니다. 그 위로를 통해 한번쯤은 숨을 쉬어갈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겠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책을 읽는 목적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가시고기』는 먼저, 그런 눈물을 안겨주기에 적당한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을 대하는 그 순간에 제 자신의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솔직해질 수 있다는 건 분명히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흘리는 눈물을 통해서 모종의 다짐과 새로운 출발의 의지를 내부적으로 다지게 되는 기회를 마련하기 때문이니까 말입니다.

     

다음으로, 자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생각하는,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자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어떻게 자식을 대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길인지, 간섭자의 위치가 아닌, 어떻게 하면 삶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버팀목으로서 부모가 존재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제시하는 모습들만이 자식을 진정한 사랑으로 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순 없겠습니다만, 저에게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진정으로 큰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지, 그 다양한 방법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 작품이었다는 생각은 해보게 되었습니다.     


상식적인 통념에 의하면 아이에 대한 사랑은 아무래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어머니의 사랑은 헌신적이어도 아버지의 사랑은 그렇지 못한 쪽으로 그려지게 마련이고, 우리 주변에서도 자식에 무관심한 듯 보이는 아버지들도 적지 않은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정말 아버지에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걸 쉽게 이끌어내어 표현하는 데 미숙하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저자는 얘기 속의 주인공인 아버지의 사랑을 가시고기에 빗대어 그 큰 사랑을 통해 느껴지는 슬픔과 숭고함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붙이라고는 아이에게나 자신에게나 둘 뿐이었던 부자지간. 다니던 직장을 잃어가면서까지, 게다가 자신을 극진히 따르고 자신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헌신적인 한 여인의 사랑마저 뿌리친 채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부어 줍니다. 이 대목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현실 속에서 이런 아버지의 사례를 얼마나 맞닥뜨리게 될까, 하고 말입니다. 마치 가시고기처럼,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눈을 팔아 수술비를 마련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솔직히 현실감이 다소 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한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부모의 사랑은 그 크기를 잴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혼한 가정에서 그것도 심각한 병(백혈병)에 걸려 있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모든 고난을 이겨나가며 그 아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안겨주기 위한 아버지의 몸부림은 가히 눈물로 밤을 지새울 만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뭐, 유치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느새 읽다 보면 작품 속의 아버지는 제가 되고 또 아이는 저의 아이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소설 속의 주인공인 아버지가 저였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이미 정답이 제시되어 있지만 커다란 거부감은 생기질 않습니다. 그와 같은 선택을 한 아버지의 모습에 그 어느 누구도 돌팔매질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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