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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23. 2023

한국 추리소설의 개척자

030: 김내성의 『마인』을 읽고……

한국 최초의 본격 장편 추리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김내성 선생의『마인』을 읽었습니다. 누구나가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단번에 김성종 작가를 떠올리게 되는데, 책의 뒤표지에 적힌 그분의 이 책에 대한 추천사가 눈에 띄더군요.

"나는『마인』을 읽고 나서 한국 추리소설의 논법을 배웠다. 추리소설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마인』을 가장 먼저 추천한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마인』은 정확히 1939년 2월 18일부터 10월 23일까지 팔 개월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작품이다. 발표 당시의 장르명은 장편 탐정소설. 193X년 4월 15일, 세간의 사람들에 의해 일명 공작부인이라고 명명되고 있는 세계적 무희 주은몽의 생일 기념을 위해 개최된 가장무도회장의 화려한 풍경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가면무도회가 진행되고 있던 중 주인공 주은몽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의 칼에 맞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주은몽의 남편인 재력가 백영호, 그의 아들 백남수, 딸 백정란, 정란의 약혼자 문학수 등이 연이어 살해되는 비극적 상황이 이어진다. 매혹적인 미모의 무희 주은몽, 주은몽의 마력에 휘말린 재력가 백영호와 화가 김수일, 신분콤플렉스와 성공에 대한 집착에 휩싸인 천재변호사 오상억, 그리고 조선 최고의 명탐정 유불란. 정욕과 증오, 탐욕과 복수에 사로잡힌 이들 인물들을 중심으로『마인』은 조선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었던 본격 탐정소설의 장을 열어간다. ☞ 작품 해설 「1930년대의 조선과 이국적 탐정소설『마인』」中에서, 본 책 478~479쪽


작품이 창작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70여 년은 족히 넘어서이기 때문일까요? 흥미진진하고 복잡다단해야 할 탐정소설(추리소설)인 이 작품이,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어딘가 추리소설에 금방 입문한 사람이 쓴 듯한 냄새-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동원되었다거나 사건을 둘러싸고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고도로 치밀하게 얽혀 있다거나 한 그런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가 나는 책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오해는 새로운 장르 문학을 수용하지 못하는 전반적인 독자층들을 겨냥한 변형된 형태의 추리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김내성 선생의 고뇌가 작품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이 작품이 쓰인 연대가 1939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이 책에 후한 평을 기꺼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요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양하다 못해 기괴스럽기까지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웬만한 자극엔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은 보다 더 깊거나 세밀한 자극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지금 읽어도 그 재미는 충분하겠지만, 코난 도일이나 모리스 르블랑 같은 고전적인 추리소설가들의 작품 혹은 추리소설계의 대모 격인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읽어 보면 조금은 시시하단 생각이 드는 것도 다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고전의 가치는 평가절하되는 법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다소 유치하고 어딘가 엉성한 데가 없지 않아 보인다 해도 이런 고전으로 손꼽을 만한 작품들이 있었기에, 이들 작품들이 바탕이 되어 지금과 같은 다양한 기호도를 충족시켜 주는 추리소설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책의 가치는 책의 말미에 붙은 작품 해설에 더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사설을 한 마디 보탠다면 아마도 최근에 읽은 책들 중에서 이 책만큼 작품 해설이 잘 된 것도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쉬운 내용과 상세한 설명으로 원작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주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에드거 앨런 포,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등의 작품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는 추리, 탐정물에 대해 대중이 높은 호응을 보인 데 비해, 변변한 창작 탐정물 한 편 지니지 못했던 삼십 년대 조선 탐정문학의 현실, 과학적 발전이 전무했으며,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가 여전히 특수 지역,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었고, 문맹률이 여전히 반을 넘어서고 있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려한다면『마인』의 등장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기적과도 같은"일이었다. ☞ 작품 해설 「1930년대의 조선과 이국적 탐정소설『마인』」中에서, 본 책 478쪽     


그래서인지 김내성 선생은 일본에서 익혀 온-그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의 유명 탐정소설 전문잡지인『프로필』의 문예 현상모집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우리나라에선 다소 변형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처음 그가 갖고 있던 계획들을 그대로 작품에 담아놓아 봤자 그를 익히 소화할 만한 독자층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선택하게 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추리의 부분을 독자들에게 맡기기보다는 가능한 한 작가의 설명의 부분으로 남겨둠에 의해 추리의 묘미가 아닌 추리의 난해함으로부터 독자들을 구원해 주는 것, 그것이 김내성이 선택한 삼십 년대 조선에서의 탐정소설의 창작방안이었다. ……(중략)…… 탐정소설의 객관적 묘사와 문예사조의 주관적 묘사, 이 양자를 절충한 변격 탐정소설의 창작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탐정소설에서조차 퇴보한 기형적 탐정소설을 창작해 낼 수밖에 없었던 이 상황으로부터 탐정소설 작가로서의 김내성이 처한 극심한 딜레마를 읽을 수 있다. ☞ 작품 해설 「1930년대의 조선과 이국적 탐정소설『마인』」中에서, 본 책 486~487쪽     


상황이 위에서 진술한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었다면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시도였다고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이 땅에서의 전무후무한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는 개척자로서의 그 고뇌가 얼마나 깊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거나 그는 분명 이 시대에 와서, 새로운 가치 매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쩌면 이 때는 구성의 치밀함이나, 이야기의 흡입력 등으로 대변되는 작품의 완성도라는 측면은 별개로 생각해 봐도 무방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품이 조금도 구성이 치밀하지 않다거나, 하도 오래전에 쓰인 작품이다 보니 이야기에 대한 흡입력이 지금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현저히 떨어진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탐정소설에 대한 멸시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삼십 년대 조선문단에서 그는 탐정소설을 여타 순문학 장르들과 동등한 하나의 문학 장르로서 설정, 전문작가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면서 등장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행동이 적어도 상당한 용기와 확신을 필요로 했던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기의 조선이 탐정소설에 대한 김내성의 이 열정을 수용할 만큼 성숙되어 있었던 것일까. ☞ 작품 해설 「1930년대의 조선과 이국적 탐정소설『마인』」中에서, 본 책 480~481쪽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던 시점에, 심지어 이해는 고사하고 문맹률마저 지극히 높아, 작가인 당사자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새로운 장르의 도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때에 국내에 처음으로 추리소설을 도입하여 독자들에게 보다 더 다양한 작품 세계를 열어 준 그 한 가지만으로도 김내성 선생은 충분히 칭송받아 마땅하고, 이 작품 또한 그런 일환으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인미답의 길을 밟은 그에게 추리소설 치고는 너무 시시한 것 아니냐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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