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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24. 2023

아이보다 못한 어른이 왜 이렇게 많을까?

031: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고…… 

이 책을 읽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이 난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창인의 『가시고기』입니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이야기 말입니다. 어찌 보면 그래서 김애란의 이 작품은 조창인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상이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그 점이 조창인의 작품과는 또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조창인의 작품에선 아이를 살려내려는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 뒤엔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지가 곧았던 아버지의 아이에 대한 그 올곧은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른이 어른다웠기에 그와 같은 헌신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의 주인공의 부모들은 고작 열일곱에 지나지 않는 그들의 아들보다도 못한 어른들이었다는 데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런 상황에선 어른이 아이를 다독거리고 이끌어 줘야 하는데 이야기 속에선 거의 그렇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부모보다도 더 속 깊은 아이, 흔들리는 부모들을 다독이며 자기중심을 잡고 죽음의 문턱으로 향하는 아이에게서 사실 슬픔의 강도는 한층 더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로증, 말 그대로 일찍 늙는 병, 주인공인 아름이는 열일곱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체 연령이 무려 팔십 세에 해당될 정도로 급속히 늙어버렸습니다. 늙으면 피부만 노화되는 게 아니라 몸속의 장기마저도 파괴되어 간다고 하니, 급속한 노화의 끝은 결국엔 죽음일 것입니다. 작품 구석구석에서 이 아름이가 흔들리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이지 ‘어쩌면 이리도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이가 대견스러웠고 그 대견스러움이 더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병에 있어서 그 정도가 더한 지 덜한 것인지 하는 따위가 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조로증에 걸린 자식을 둔 부모들의 심정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리적인 나이로는 분명 부모가 연장자이지만, 육안으로 봤을 땐 누가 봐도 자식이 부모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사실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슬픔과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아름인 삼십 대 중반 밖에 되지 않은 아빠에게 종종 그런 말을 하곤 합니다.

“어우! 아빠! 아빠도 나중에 나이 들어 봐요. 얼마나 힘든지…….”

또 자신을 병간호하면서 몸고생 마음고생하는 부모를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기도 합니다.

‘아빠도 몇 십 년 후면 지금의 내 모습이 되겠지?’

어찌 보면 희극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어떻게 해도 시원스레 분출할 수 없는 슬픔을, 짤막짤막한 우스갯거리로 표현했기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의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좋아하던 책도 못 읽고 노트북을 열어 편지를 주고받곤 했던 그 아련한 설렘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서 이성을 느끼게 되었던 그 소중한 경험들을, 잃어버린 시력과 함께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아름이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실제로 조로증을 앓는 아이 중 누군가가, 과연 이 이야기 속의 아름이처럼 이렇게도 다양한 활동들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남들이 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포기한 채 겨우 이 정도만 자신에게 허락된 일들이, 그마저도 종국엔 모두 다 접어야 했던 아름이가 너무도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불쌍함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아빠와 엄마를 한 번씩 부르며 많이 보고 싶어질 거라며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을 때 그 어느 누구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건강한 것만큼 큰 자산은 없다고 했습니다. 모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을 볼 때면, 몇 천 원 안 되는 ARS 전화를 통해 불우한 이웃이나 난치병 혹은 불치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선 환우들을 도우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내가, 혹은 내 가족 중에 저런 식으로 병들어 고생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복인가?’

모래알만큼이나 무수히 남은 날들을 두고 지금의 제 자식들이 무탈하게 잘 자라나는 것을 두고 건강을 장담할 수야 없겠지만, 몇 번이나 잠이 든 가족들을 내려다보며 정말 이것이 저에게 주어진 작지 않은 축복이란 걸 새삼 느끼고 또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추천한 작가들도 그랬고, 이미 읽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작가 김애란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라고…….

무섭도록 섬뜩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침착함과 기지를 발휘하게 했던, 김애란의 단편 「물속의 골리앗」도 그랬지만, 이 책 역시 모든 설정과 상황들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움이 교묘하게 잘 감춰져 있습니다. 흔치는 않은 것이긴 해도 엄연히 우리 삶 속의 너무도 슬프고 두려운 한 일면을 다루는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또, 흔히 흡인력이라고 표현하는 그 부분에서도 이 책은 충분히 그 진가를 발휘하고도 남는 것 같습니다.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할 만큼 작가는 우리를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까지 몰고 갑니다. 물론 그 마지막 장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과 감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건 어쩌면 아쉬운 점이 아니라 '옥에 티'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한아름이, 부모인 한대수와 최미라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이야기인 「두근두근 그 여름」은 어쩐지 사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는 것입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은 그동안 시작부터 끝까지 열심히 몰고 왔던 감동의 깊이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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