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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Oct 23. 2023

퇴근길 기차

백 스물일곱 번째 글: 이것도 월요병일까요?

이제 집으로 가는 기차에 오릅니다. 일단 이 시간에 타면 기차가 생각보다 한산해서 좋긴 합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1시간 전보다는 더 저녁에 가까워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사람들도 조용한 편입니다. 가만히 앉아 혹은 자리가 없으면 서서 이것저것 딱 생각하기 좋은 타이밍입니다. 옆자리에 이상한 사람이 타는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이상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열차가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습니다.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요란한 파열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열차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연신 들려옵니다. 제가 탄 객차의 마지막 끝칸이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순간 주변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차창 밖으로 흐릿한 사물이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제가 탄 기차는 평소에 타던 무궁화호가 아니라 ITX-새마을호입니다. 얼마나 더 빠른지는 모르겠지만, 온통 칠흑뿐인 어둠 속에서 간간이 빛나는 조명만 눈에 들어옵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저 반대편에서 달리고 있을 뿐인데도 낮의 눈에 각인되었던 그 풍광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지금은 어느 것 하나 뚜렷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이 선명한 자취를 드러내던 낮과 달리 밤은 그저 실루엣만 하늘거릴 뿐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그 실루엣이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합니다. 형체가 보이지 않으니 굳이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눈을 뜨지 않아도 좋다는 건 눈을 감아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감은 두 눈 위에, 그리고 차창 위에 제가 그린 이미지가 그려지게 됩니다.


상념이라 해도 좋고 미처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미련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매끄러운 유리면 위에 낱낱이 그려지는 갖가지 도형들이 어지러운 제 마음처럼 그려졌다 지워졌다를 되풀이합니다. 도형이란 건 닫혀 있는 법, 그래서일까요? 꽁꽁 닫혀버린 제 마음이 다시금 심란해지려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밤이 더 반갑기만 합니다. 만약 저것들이 또렷한 형체가 되어 제 눈에 새겨진다면 어쩌면 이 밤에 악몽을 꾸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형체가 없는 그림에, 형상이 없는 실루엣에 풀어졌던 제 마음이 놓여납니다. 그리고 놓여난 제 마음 위에 한숨을 얹어봅니다.


조용했던 기차 안의 장면을 마치 옮겨오기라도 한 듯 지하철 안도 정적 그 자체입니다. 금세라도 쓰러질 듯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 모두가 월요병을 겪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노곤한 몸을 달래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냥 이렇게 영원히 레일 위를 달리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간간이 들리던 몇몇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축 늘어진 몸을 열차 안에 널부러 놓자마자 열차는 달리고 또 달려갑니다.


이러다 저도 잠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지하철 안에서, 열차의 요란한 바퀴 소리는 오히려 자장가처럼 들립니다. 이제 네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데 오늘은 이 길이 왜 이리도 멀게 느껴질까요? 제가 내릴 때쯤 누군가가 저를 일으켜 세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이 역시 월요병인 걸까요?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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