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여유
백 서른두 번째 글: 이런 여유도 가끔 필요합니다.
사진 속의 테이크 아웃 용기, 다행히도 이번엔 누군가가 버리고 간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캐러멜 마키아또 한 잔을 들고 와 공원 벤치에 두고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이곳은 학교 건너편에 있는 작은 공원입니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어서 퇴근할 때 종종 들르곤 하는 곳입니다. 처음 갈 때에는 학부모나 아이들을 더러 만나게 되는 곳이라 신경이 쓰였지만, 이젠 몇 번을 들러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인사하면 되고, 어차피 자유로운 사색 시간은 저만 즐기면 되니까요.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저희 반 반장, 부반장 어머님과 마주쳐 인사를 나눴습니다. 숱하게 아이들도 봤지만, 웃으며 인사하고 전 제 루트를 따라왔습니다. 역시 이곳은 올 때마다 한적한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의외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글을 구상합니다. 길이는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생각한 내용을 고스란히 옮길 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버스 도착 시각까지 남은 30분 남짓한 시간에 지금처럼 이렇게 글도 써 봅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져도 괜찮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 못 쓰면 버스에 타서 쓰면 됩니다.
곧 연재할 장편소설을 머릿속에 떠올려 봅니다. 등장인물을 대략적으로라도 확정하고, 혹시 새롭게 등장시킬 만한 인물은 없는지 살펴봅니다. 다음으로는 배경입니다. 적절한 배경이 있어야 인물이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으니까요.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시점의 선택입니다. 당연히 지금은 가닥이 잡힌 상태입니다만, 아직도 1인칭으로 쓸지 3인칭으로 써야 할지에 대해선 제 안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 중입니다. 각각의 단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장점을 생각하면 그 어느 것도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대략 절반쯤 써놓은 초안은 3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만약 1인칭으로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면 아예 렌즈 자체를 갈아 끼워야 합니다.
버스 시각이 어느덧 다 되어갑니다. 키패드로 글자를 두드려가며 공원을 나와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글의 막바지, 아직 버스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읽어보고 발행할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 손을 멈추고 지금까지 쓴 내용을 훑어봅니다. 뭐, 이 정도면 될 듯합니다. 100%의 만족스러운 글은, 지금의 제 능력 안에선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꼭 커피 전문 매장에 앉아 유유자적하게 차를 즐기지 않더라도, 공원에 잠시 앉아 혹은 길을 걸으며 차 한 잔의 여유를 갖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입니다. 마침 저 아래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는 버스가 보입니다. 3500원이 주는 위안, 차 한 잔의 여유가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사진 출처: 작성자 본인이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