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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Nov 07. 2023

나를 먼저 사랑해야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044: 심효은 작가의 "나는 나에게 다정한 사람"을 읽고……

한 이웃 작가님인 '심횬' 작가님의 방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당당하게 작가 소개란에 이렇게 밝히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긍정의 삶을 나누고 싶은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공교육의 변화를 꿈꾸며 삶의 예쁨, 일상에서의 수많은 사유를 글로 풀어봅니다.


사실 이 작가 소개란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작금의 암울하기 짝이 없는 교육 현실을 생각했을 때 지금의 교육 현장이, 어찌 보면 결코 긍정적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님은 지금의 이 무기력한 공교육의 변화를 꿈꾸고 있으며 그런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던 차에 작가님의 저서가 나왔습니다. 제 입장에선 일면식도 없는 분이라 서평을 신청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비록 학교급은 다르나 일선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동질감 하나만 믿고 용기를 내어 작가님(선생님)에게 책을 보내주십사 부탁드렸습니다.


저는 현재 초등학교에서 24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체육 수업을 하다 인대가 끊겨 어쩔 수 없이 1달간 병가에 들어갔던 일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던 나름 열혈(?) 교사입니다. 물론 이런 저에게 지금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딱 잘라서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또 제가 만나는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품으려면 먼저 나 자신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글쎄요, 만약 이런 것을 교사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작가님은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했었고. 숨고 싶었지만 당당한 척했던 그때의 나를 만난다. ☞ 본 책, 20쪽


교사라는 직업은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제 자신이 불완전해도 그 불완전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아이들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못합니다.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존감이 부족하고 정체성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딘가로 자꾸만 숨어버리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은 그때의 그런 자신을 만난다고 당당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물 항아리에 천천히 물을 채우듯 교사의 신념은 세월이 쌓여 채워진다. ☞ 본 책, 21쪽


특별한 것 없는 말 한마디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각인이 됩니다. 후배 선생님들이 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대면 저는 다소 천박하긴 해도 저는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곤 합니다. '뭐, 우리가 장사 하루이틀 합니까?' 작가님의 말처럼 교사의 신념이라는 것은 지금부터 가져야지, 한다고 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민과 갈등을 헤쳐나가면서, 즉 세월이 그만큼 쌓여서 채워지는 항아리 속의 물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별다른 소신이나 사명감 없이 어디까지나 직업적인 교사의 위치만 유지하는 분도 없지 않을 테지만, 일선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신 많은 선생님들은 지금도 똑같은 걱정과 고민을 하며 오늘도 아이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교사)는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려면 일종의 교육 철학 혹은 학급의 운영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확한 학급 운영의 철학이 부재하다면 교사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멈추어 들여다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그 시간들이 교사의 삶, 아이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 본 책, 41쪽


오래 현직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니 실제로 학급 운영의 철학이 부재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보곤 합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한 때의 저 또한 그러했고, 일상 속의 하루하루를 그저 쳐내기에 바쁜 교사는 그런 명확한 학급 운영의 철학을 갖는다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잠시 멈추라고 합니다.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 바쁜 때에 멈추면 어떻게 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달리는 차창 안에서 바깥의 사물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 이치를 생각하면 우리가 왜 멈춰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작가님은 정작 마흔이 되니 학교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그건 쉰둘이 된 지금의 저에게도 마찬가지의 중압감으로 다가옵니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너무 무겁듯 쉰이라는 나이도 만만치 않은 것은 물론이며,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예순이 되었다고 해서 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리가 짊어진 일종의 굴레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굴레 속에서 저 역시 오늘도 작가님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수업에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만 갖고 달려들었던 그 한창때에 수업을 더 잘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수업은 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이런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작가님은 아이들과 만나기 위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라(본 책, 83쪽)라고 말합니다. 우린 일상적으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최소한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모든 수업이나 업무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교실 문을 연다는 것은, 교사라는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 그 수많은 아이들의 눈빛과 열망 등을 오롯이 교사의 것으로 품는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무엇이든 그렇겠지만, 저 또한 작가님의 표현처럼 달려야 할 때, 멈춰야 할 때를 알려 주는 신호등이 있으면 좋겠다(본 책, 175쪽)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멈춰야 할 때보다는 달려야 할 때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는 반드시 멈출 수 있어야 다시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조금은 더 학교에서 몸담아 본 경험을 빌어 당당한 마흔을, 이제는 비로소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어 가는 마흔을 지내고 있을 작가님을 응원하며 마지막 한 구절을 되새겨볼까 합니다.


그렇게 마흔을 앓고 있다.
단단히 앓고 나면 뿌리부터 튼튼해져
흔들림 없이 견고해질 테니,

괜찮아, 마흔은 다들 그런 거니까. ☞ 본 책, 219쪽


물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단히 앓고 나면 뿌리부터 튼튼해져 흔들림 없이 견고해지는, 그런 쉰을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본 서평은 '심횬' 작가님의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도서를 무상으로 받아서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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