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일흔다섯 번째 글: 순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이......
무려 32년 만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아마도 이맘때 저와 헤어졌으니 3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인연은 기억 속에 있을 때가 그나마 아름답다고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현주(물론 가명입니다)를 봤었지만, 예전의 그런 설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뭐랄까요, 볼품없이 늙어버린 한 아줌마가 제 눈에 들어왔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현주에게도 나이만 덕지덕지 먹어버린 꾀죄죄한 한 아저씨만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모든 게 거짓말 같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간에 한때는 뜨겁게 사랑했던 사랑이었는데, 비록 잘못 꿰어진 단추 같은 관계였다고 해도 그녀가 저에게서 떠난 뒤로 정말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때, 그렇게도 보고 싶던 그때에는 거짓말처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녀의 일터 근처로 가서 그녀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그럴 때조차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오늘 제 눈에 띈 겁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응, 넌?"
"나도 잘 지냈어? 결혼은 했어?"
"응, 애도 둘이나 있어."
"그랬구나.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니 다행이다."
그냥 상상 속으로만 만들어 놓은 대화지만, 아마도 옆에 있었다면 그 정도의 말은 붙이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물론 정말 그렇게 했을지는 저로서도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때마침 제가 타야 할 지하철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전 그녀가 보이는 창쪽으로 가 섰습니다. 한 번이라도 그녀를 더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뭐, 어쨌건 간에 이렇게 마주치고 나면 아마도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녀 역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입 모양으로 저에게 뭐라고 말을 했습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전 그 말이 '미안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오래전에 저에게 했던 같은 말은 마음이 담기지 않았지만, 이번 말은 분명 진심을 담아 한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머릿속에 들어차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던 난제 하나가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나빴던 사람은 단연 저였지만, 어쨌건 간에 저는 이제 그녀를 용서(?)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