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옷상자
백 아흔일곱 번째 글: 그게 이런 기분이었군요?
집에 가 보니 꽤 큰 상자가 현관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습니다. 현관에 둔 상자는 무조건 내다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소 라벨을 뜯어내기 위해 상자를 들여다보다 '육군훈련소'라는 글씨를 봤습니다. 지금 한창 훈련을 받고 있는 아들 녀석의 옷가지가 배달된 것입니다.
듣자 하니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은 부모들이 이 상자를 보고 그렇게 운다던데, 낭만이라고는 없는 아내가 한 마디 던졌습니다.
"벌써 세탁기에 넣어 다 빨아놨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저는 눈물이 사람의 가장 솔직한 감정이라고 믿고 있기에 울 때는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시원하게 웁니다. 버리겠다며 상자를 내놓은 아내에게 기어이 한 마디 했습니다.
"이걸 버리면 우야노? 이것도 다 추억이고 낭만인데......"
추억 같은 소리, 낭만 같은 소리 하고 있냐는 듯 쳐다봅니다. 그게 뭐, 밥 먹여주냐고 말하는 눈치입니다. 버릴 수 없다고 우겨 아들 녀석의 방 한쪽 구석에 상자를 다시 들여놨습니다.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는 아들, 그 녀석이 군대를 간 지도 벌써 18일째에 접어듭니다. 부모로서 BTS만큼 유명하게 키워놓지 못해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쓸쓸히 입대한 아들놈의 옷상자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몰랐네요.
세상의 모든 시간이 정지해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일 뒤면 퇴소하는 날입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신 제 어머니도 29년 전 저의 옷상자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더군요. 부모의 마음은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카톡 프로필에 올려놓은 디데이, 529일이 남았다고 찍혀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지금은 이렇게 손꼽아 기다리지만, 일상에 떠밀려 어영부영하다 보면, 저 무지막지해 보이는 세 자리의 숫자도 어느샌가 두 자리로, 그리고 다시 한 자리로 바뀌어 있을 겁니다.
추억과 낭만을 먹고사는, 현실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저이지만, 최소한 아들 녀석 전역 전까지는 저 상자를 버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사진 출처: 작성자 본인이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