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소설을 씁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리는지요? 그렇다면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소설을 씁니다. 읽는 이 거의 없는 그런 소설을 씁니다. 직품성을 따질 계제도 없고, 재미는 더더욱 없는 그런 소설을 씁니다. 네, 맞습니다. 제가 쓰는 소설엔 딱 '소설 나부랭이'라고 지칭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귀한 시간 쪼개가면서까지 왜 굳이 그러고 있냐고 말입니다. 오죽하면 그럴 시간에 발 닦고 잠이나 자라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언젠가 한 번 그런 말을 한 친구가 있습니다. 당장 출간할 게 아니라면, 최소한 수백 혹은 수천 명이 읽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면, 어딜 가서 그렇게 쉽게 소설 쓴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어딜 가서든 자신 있게 소설을 쓰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곤 합니다.
"주로 시간이 날 때 뭘 하세요?"
"네, 소설을 씁니다."
"우와! 그러면 혹시 출간한 소설의 제목은 어떻게 되나요?"
"아직 책으로 출간한 작품은 없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면 그러면서 왜 소설을 쓴다는 말을 했는지 나무라는 투로 표정이 바뀝니다. 적어도 대화 상대방의 관점에서 봤을 때 뚜렷한 결과물이 없다면 함부로 소설 쓴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긴 그런 생각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자신이 노래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하다못해 전국노래자랑 등에 나가 인기상도 받아본 적이 없는 주제에, 어딜 가서 자신을 '가수'라고 소개하는 것과 마친가지 이치니까요.
그래도 제게는 고정적인 독자가 있습니다. 확실히 제가 인지하고 셀 수 있는 독자는 저까지 포함해서 지구상에 딱 세 사람의 독자가 있습니다. 저, 아들, 그리고 제 글쓰기 친구 등입니다.
저는 이 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소설을 쓰곤 합니다. 물론 제가 쓰는 소설은 가장 우선적으로 제가 보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나머지 두 독자를 의식해서 쓰는 겁니다.
이제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저의 소설을 읽어주는 독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저는 소설을 쓸 것입니다. 무려 세 사람이나 있으니 이 이상 소설을 써야 할 이유가 또 어디 있을까요? 행여 지구상에 제 소설을 읽는 최후의 1인, 즉 저라도 남아 있는 한, 저는 소설을 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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