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했던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듣고도 나는 그를 보기 위해서 장례식장을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가지만 후회도 그리움도 없다.
국민학교시절부터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우정이라는 이유로 친하게 지내오던 친구 녀석이었다.
학창 시절을 지나 내가 가정을 꾸리고 돈문제로 인연을 끊고 지내다가 몇 년 만에 들었던 소식이 도박빚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했다. 지가 처음 산 차에서 번개탄을 피워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나 말고도 친했던 여러 친구들과 손절을 했다고 한다. 오랜시간을 같이 보냈음에도 손절은 너무 쉬웠다. 뭐가 그렇게 좋았던 건지 도박에 손을 대면서 그의 시간도 불행을 시작했을까.
어머님이 어렵게 사주신 아파트를 도박으로 그대로 날리고 나서 자살을 선택한 것 같았다. 집을 사준게 오히려 독이 된 걸까.
1년 전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을 하늘로 보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마치 가족처럼 정말 가깝게 지내던 동생이었는데
그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어떤 슬픔이 있었는지 가까이에서 있으면서 그 슬픔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해서 그가 하늘로 가는데 말리지 못했다.
단지 우리가 같이 지내는 소중한 세상에서 하늘로 갔을 뿐인데 뼛속깊이 파고드는 그리움과 원망은 어떻게 해소할 방법이 없다.
생각을 해보면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삶을 보내면서 가장 잘못한 선택일까. 아니면 그들의 선택 중에서 가장 베스트였다고 자부할 만큼 좋은 선택이었을까.
힘든 시간 보내다가 편안한 시간을 맞이한 그들이기에 그 선택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소중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세상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가족들은 지옥 같은 그리움과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만 말이다.
하늘에서 잘 있지? 우리 가족은 6월에 또 이사를 가. 차곡차고 모으고 아껴 쓰면서 가고 싶어 했던 아파트로 다시 이사를 가.
그때 같은 선택을 해서 같은 곳으로 이사를 갔다면 우리의 시간이 좀 달랐을까?
너의 가족들 소식은 듣고 있으나 좋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네가 곁에 있었다면 분명히 대단하다고 같이 이사하자고 했을 건데 니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사를 하는데 아쉬움과 그리움이 또 사무치게 온다.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했던 너의 하늘에서의 시간이 부디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면서 힘든 만큼. 네가 하늘에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으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