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에 짧게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는 학생들을 인솔해서 캠프에 입소시키고 아침에는 태권도와 골프를 저녁에는 인원파악 및 점호를 담당하는 아르바이트였다. 사실 그때의 내 골프 수준은 초보였다. 학교에서 골프수업만 듣고 가르치다 보니 똑딱 볼 정도만 가르칠 수 있었다. 사실 그중에는 초등학생이지만 필드에 나가 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도 있고 풀스윙 폼이 나보다 더 나은 아이들도 많았다. 아르바이트 처음 계약 시엔 골프, 태권도만 가르치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영어캠프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호신술, 수영, 골프, 태권도, 줄넘기 등 시간을 쪼개서 다른 과목들도 가르치며 아이들과 함께 했었다.
그때 나는 경호비서학과를 다니면서 사회체육학과를 복수 전공으로 배우다 보니
여러 가지 종목들을 할 수 있었다.
아침엔 아이들을 깨워 인원파악하고 체조하고 운동을 가르치고 화이트비치 조깅을 하면서 보홀이 너무 매력 넘치는 섬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영어수업을 받을 때에는 나는 스쿠버다이빙을 주로 했다. 학교에서 스쿠버다이빙에 대한 지원이 좋아서 수업으로 이미 배운 터라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다이빙샵에서 공기통과 장비를 대여하고 현지인을 버디 삼아 잠수를 많이 했었다.
'나중에 내가 아이를 낳으면 물속을 꼭 보고 체험하게 해야지.'
'아들이었으면 좋겠는데.'
버킷리스트 1번이자 꼭 해보고 싶은 꿈이었다. 그때 나는 아르바이트 및 학교 수업 덕분에 세부, 보홀, 마닐라, 보라카이 등 필리핀 여러 바닷속을 잠수하면서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신혼여행을 나의 강력한 바람으로 아내와 함께 보라카이를 다녀왔었다. 그 후로 13년이 지나 다시 보홀에 가게 된 것이다.
보홀에 와보니 내가 생각했던 보홀과는 다르게 많이 변해있었다. 한국에서 바로 갈 수 있는 직항이 생겼고 중심지에는 한국사람들이 영업하는 식당, 마사지샵, 커피숍이 많아졌었다.
20년 전 보홀에는 한국사람이 자주 찾는 섬이 아니라 대부분이 현지인이 운영했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중심해변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섬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기분이 묘했다. 어렸을 때 보홀에서의 나는 체중은 100kg을 넘었고 패기가 넘쳤으며 용돈이 항상 부족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살도 빠졌고 패기는 잃었으며 가족을 얻었고 용돈도 있었다. 아이들이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를 얘기하면 해 줄 수 있는 충분한 용돈이 있었다.
너무 행복했다. 날씨가 더워서 힘들었지만 가족과 함께 찾은 보홀은 너무 좋았다.
일로서 온 게 아니라 가고 싶지 않은 관광지는 안 가도 되고 낮에 산미구엘 맥주를 마시면서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도 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여행 2일 차에 나는 아들과 수심 15m 정도 되는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했다.
다이빙 장비가 좋아져서 아들은 풀페이스 마스크를 착용해서 호흡하는데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1시간 정도 교육을 받고 현지인이 버디가 되어서 물속에 잠수를 했다.
(나는 2번째 다이빙할 때 거북에 등에 탔었던 기억이 있다. 다이버들에게는 큰 행운이라고 한다.)
니모를 보고 산호도 보고 물속에서 헤엄치고 사진 찍으면서 30분 정도 다이빙을 했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아들을 낳고 아들과 함께 물속 구경을 했다. 아들에 첫 소감은
'귀하고 코가 아팠어.'였다.
아무래도 긴장을 많이 한 탓에 이콜라이징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바닷속이 너무 재밌고 신기하다고 해서 나는 뿌듯하고 또 행복했다.
어느 젊은 날에 하고자 했던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다소 별거가 될 수 있는 꿈을 이루었다.
보홀의 중심가와 나는 변했지만 바닷속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들을 낳으면 하고자 했던,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먹은 거는 변하지 않는 바닷속처럼 단단하게 또 굳건하게 지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