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생경(Jātaka)』에는 부처님의 전생 중 하나인 '마하사트바 왕자'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굶주림에 지쳐 제 새끼마저 잡아먹으려 하는 어미 호랑이를 마주한 왕자는 주저 없이 자신의 몸을 절벽 아래로 던진다. 피를 흘려 호랑이의 허기를 채우고 생명을 살린 이 서늘한 희생은, 나라는 작은 존재를 버려 전체를 살리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정수를 보여준다. 진정한 용기란 상대를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던지는 '멈춤'과 '내어줌'에서 시작된다.
이런 숭고한 멈춤의 순간은 75년 전 가야산 상공에도 있었다. 1951년 3월 3일, 한국전쟁의 포화가 온 강산을 집어삼키던 때였다. 해인사 뒷산에 숨어든 공비를 소탕하라는 미 공군의 엄명이 떨어졌다. 4대의 무스탕(P-51) 전투기가 가야산의 정적을 깨우며 날아올랐다. 조종간을 잡은 김영환 편대장의 귀에는 무전기 너머 절박한 명령이 꽂혔다.
"해인사를 폭격하라! 폭탄과 로켓탄을 투하하라!"
버튼 하나면 수천 년의 지혜, 팔만대장경은 거대한 폭발 속에 한 줌 재로 사라질 위기였다. 구름 사이로 해인사의 장엄한 전각들이 보였다. 침을 삼키는 찰나의 순간, 그는 명령을 거부했다. "각기(各機)는 나를 따르라. 폭탄과 로켓은 물론 항공기관총 사격도 절대 금지한다!" 뒷좌석 미군 고문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찰을 태우는 것은 공비를 잡는 것보다 더 큰 민족적 손실이다!" 사선을 넘나드는 전장에서 군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그 단호한 기수 돌리기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장경판전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순야옹은 그 결단의 무게를 사유하며 가야산 소리길을 걷는다.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을 거쳐 오르는 길, 해인사의 뒷산인 가야산 능선은 마치 부처님의 주름진 이마처럼 깊고 장엄하게 절을 감싸고 있다. 경내 가장 높은 곳, 수다라장(修多羅藏)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천년의 숨결을 보존해온 장경판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전각 앞에 서니 격자창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드나든다. 위아래 창살의 크기를 달리하여 공기가 자연스레 순환하도록 설계된 조상의 지혜가 경이롭다. 나무 판들이 습기를 머금고 뱉으며 수백 년을 견뎌온 것은, 그 나무가 바닷물에 절여지고 갯벌에서 말려지던 인고의 시간을 거쳤기 때문이다. 장경판전 근처 너럭바위에 앉아 배낭에서 보이차 도구를 꺼낸다.
문득 전래동화 속 '나무꾼'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친다. 산신령이 나타나 금도끼와 은도끼를 내밀며 유혹할 때, 그는 눈앞의 화려한 보물에 눈멀지 않았다. "제 것은 낡은 쇠도끼뿐입니다."라는 그의 정직함은 단순한 도덕적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지켜야 할 본분과 진실에 대한 지극한 응답이었다. 김영환 장군 역시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군령 수행'이라는 화려한 공훈 대신,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쇠도끼 같은 진실'을 택했다. 정직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이 결국 이 세상을 구원하는 법이다.
스테인리스 보온통의 뜨거운 물이 표일배 속 찻잎을 깨운다. 진한 갈색으로 우러나는 보이숙차의 향기가 전각의 묵직한 나무 냄새와 섞여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찻물이 잔을 채우듯, 75년 전 그날 가야산 상공을 메웠던 것은 죽음의 비명이 아니라 문화를 지키려는 한 군인의 뜨거운 심장 소리였다.
보이차 한 모금에 가야산의 찬 공기를 섞어 마신다. 갈색 사유 속에 잠긴 대장경판의 글자들은 이제 죽은 문자가 아니라 생명의 소리로 살아난다. 이름 없는 각수(刻手)들이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한 번 올렸다는 지극한 정성이, 오늘 순야옹의 찻잔 속에 은은한 온기로 남아 주말의 평온을 전한다.
가야산 굽이진 능선 아래
천년의 글자들이 숨을 쉰다
폭발의 화염 앞에서도
기수를 돌린 그날의 뜨거운 마음이여.
보이차 한 잔에 실려 온
장경판전의 마른 나무 내음
결국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남길 유일한 이름임을.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원한을 버려야만 비로소 가라앉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법구경』 제1장 쌍요품 5게송 중)
'순야(純爺)의 갈색 사유'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차 향기와 함께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지혜의 문장이 당신의 주말을 포근하게 감싸 안기를 바랍니다.
純爺(sunya)의 갈색 사유 2화 재동(齋洞)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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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爺(sunya)의 갈색 사유 1화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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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가야산의 너른 품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안아주며 행복하고 평온한 시간 보내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