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에 있을 때는 성과가 눈에 바로 보이는 '소나기' 같은 일처리를 좋아했습니다. 요란하고 강력해야 세상이 변한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은퇴 후 아파트 베란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합니다. 메마른 도심의 화단을 깊숙이 적시는 건, 요란한 폭우가 아니라 저 소리 없이 내리는 보슬비라는 것을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순간을 목격합니다.
울산대공원 산책길에 봄비가 보슬보슬 내립니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부드러운 빗줄기입니다. 빗물은 겨우내 딱딱하게 굳어있던 산책로 옆 흙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잠자던 생명을 흔듭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흑갈색 젖은 흙을 뚫고 연두색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어두운 땅 위로 돋아난 그 선명한 초록빛은 마치 어둠을 가르는 섬광처럼 '쨍' 하고 눈에 들어옵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과정은 천태학에서 말하는 삼인불성의 원리와 같습니다. 땅속에 이미 갖춰진 씨앗은 우리 안의 정인불성(正因佛性, 본래의 부처 성품)이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이를 돕는 연인불성(緣因佛性, 가르침과 선행 조건)이며, 흙을 적셔 싹을 틔우는 지혜의 작용은 요인불성(了因佛性, 수행과 지혜)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정인)이 있어도, 비(연인)가 내려 땅을 적시는 노력(요인)이 없으면 '초록 머리'는 '쨍' 하고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만나는 오늘, 당신의 불성이 연꽃 봉우리 맺듯이.
일요일 아침의 짧은 만남 한 주를 차분히 정리하고 새로운 내일을 그려보는 일요일 오전 10시, 늦은 아침의 여유 속에 [순야의 단상]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의 쉼표를 찍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야, 있는 그대로 본 것인가? 다섯, 벚꽃과 개나리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17
이제야, 있는 그대로 본 것인가? 넷, 매화와 벌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16
이제야, 있는대로 본 것인가? 셋, 솔방울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15
이제야, 있는 그대로 본 것인가? 둘, 동백과 동박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13
이제야, 있는 그대로 보이는가? 하나, 고드름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12
글을 마치며, 한 주의 시작과 끝이 모두 평온하시길 기원합니다. 몸도 마음도 정갈하고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라며, 다음 주 일요일 아침에 맑은 향기를 담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