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純爺(sunya)의 돋보기] 제4화
센과 치히로

by 순야 착지

‘이름표’ 뒤에 숨겨진 진짜 나를 찾는 법


월요일 아침, 우리는 현관문을 나서며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쓴다. 회사에 도착하면 ‘김 대리’가 되고, 거래처 앞에서는 ‘을(乙)’이 되며,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의 ‘부모’나 ‘자식’이 된다. 하루 종일 수많은 호칭으로 불리지만, 정작 거울 속의 나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다시 보며, 나는 온천장의 주인 유바바가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는 장면에서 현대인의 서늘한 초상을 보았다. 그것은 불교가 말하는 가명(假名)의 세계에 깊이 매인 채, 이름표로 다 담기지 않는 삶의 바탕, 곧 진여(眞如)를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과 놀라울 만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일과 다름없다.


이름을 뺏기면 돌아갈 수 없는 세계

영화 속 열 살 소녀 치히로는 신들의 온천장에서 일하기 위해 마녀 유바바와 계약을 맺는다. 유바바는 치히로의 이름(荻野 千尋)에서 글자를 떼어 내고, ‘센(千)’이라는 이름만 남겨 둔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센이다. 묻지 말고 대답이나 해.”


이 순간부터 치히로의 과거와 개성은 지워지고, 온천장의 노동력으로서의 기능이 앞세워진다. 소년 하쿠는 치히로에게 경고한다. 유바바는 상대의 이름을 빼앗아 지배하며, 이름을 잊어버리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어려워진다고.

이 설정이 서늘한 이유는 분명하다. 이름을 뺏긴다는 것은 곧 ‘나’라는 주체성을 잃고, 시스템이 부여한 역할 안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일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하쿠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유바바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직함과 역할에 매몰되어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잊은 현대인의 초상과 겹쳐 보인다.


왜 우리는 이름표에 스스로를 가두는가

‘이름의 상실’을 심리학과 정신분석의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우리가 왜 사회 속에서 공허함을 느끼는지가 조금 더 선명해진다.

라캉의 상징계와 소외의 구조

라캉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인간은 사회의 언어와 규칙 속으로 들어오면서 하나의 ‘이름’과 자리를 부여받는다. 그 이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지만, 동시에 나의 생생한 욕망과 감각 전체를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이 관점으로 보면, 치히로가 ‘센’이 되는 과정은 단순한 개명이 아니라 상징적 질서로의 폭력적인 편입처럼 읽힌다. ‘센’이라는 이름 안에는 치히로의 꿈, 두려움, 부모를 향한 마음 같은 것들이 충분히 들어갈 자리가 없다. 오직 ‘일하는 아이’라는 기능적 기호가 앞세워질 뿐이다. 우리가 직함 뒤에 숨을 때 느끼는 답답함 또한 이와 닮은 소외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역할의 감옥과 자아의 분열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유바바의 온천장은 거대한 역할극의 무대처럼 보인다. 그곳의 존재들은 저마다 기능으로 분류되고, 그 기능이 곧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간다.

문제는 그 역할이 흔들리거나 사라질 때다. 퇴직 후 명함을 잃은 뒤 급격한 허무를 겪는 이들의 이야기에는, 평생 자신을 ‘역할의 이름표’와 동일시해 온 시간이 드러난다. ‘센’으로만 살던 사람은 온천장이 사라질 때 함께 무너질 위험에 놓인다.


가명(假名)을 쓰되, 진여(眞如)를 잊지 않는 법

불교에서, 특히 천태의 언어로 읽어 보면 우리가 세상에서 쓰는 이름과 역할은 가명(假名)의 성격을 띤다. 여기서 ‘가(假)’는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연 따라 잠시 성립하여 빌려 쓰는 이름이라는 뜻에 가깝다. ‘김 부장’, ‘어머니’,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삶에서 분명히 필요하고 실제로 작동하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이거나 고정된 실체는 아니다.

이 점에서 유바바의 마법은, 우리가 가명(역할)을 실체화할수록 더 강해지는 고통의 구조를 상징한다. “나는 센일 뿐이다”라고 믿는 순간, 치히로는 온천장의 질서 안에서만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물론 불교의 진여(眞如)를 문자 그대로 ‘본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영화는 우리가 역할의 이름표에 갇힐수록, 이름표로 다 담기지 않는 삶의 바탕과 존엄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사실을 탁월하게 비유한다.

치히로가 인상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센’이라는 이름으로 온천장의 일을 해내고, 관계를 맺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흔들리면서도 끝내 자신이 치히로였다는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옷 속에 간직한 카드와 기억의 단서들은, 단지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주도권을 지키는 작은 수행처럼 보인다.

이것을 나는 중도(中道)의 생활 감각으로 읽는다. 현실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역할에 완전히 잠식되는 것도 아니다. 온천장(현실) 한복판에서 ‘센’(가명)의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름표로 다 담기지 않는 자기 삶의 바탕을 완전히 잃지 않는 태도. 그것이 유바바의 지배를 벗어나는 유일한 열쇠다.


나를 항복시키는 월요일의 돋보기

오늘 아침, 당신의 목에 걸린 사원증과 명함에는 어떤 이름이 적혀 있는가. 그 이름은 당신을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이지만, 결코 당신의 전부는 아니다.

유바바는 오늘도 우리에게 업무와 성과라는 계약서를 내밀며 속삭일지 모른다.

“너는 그냥 대리일 뿐이야.”

“너는 그냥 취준생일 뿐이야.”

그때 치히로처럼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이 역할을 살아내고 있을 뿐이며, 내 삶의 존엄과 바탕은 이 이름표 하나로 다 규정될 수 없다고.

하쿠에게 진짜 이름을 돌려주었듯, 오늘 하루 과로한 자기 자신에게도 진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가명(假名)의 세계에서 살아가되, 이름표에 갇히지 않는 사람.

그는 비로소 거대한 온천장 속에서도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 선다.


[연재 알림]

<순야의 돋보기>는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 바쁜 일상 속 잠시 머리를 식히는 지혜의 스토리를 배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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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이 짧은 글이 여러분의 마음에 투명하고 평온한 돋보기 하나를 놓아드리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