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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Dec 13. 2021

이혼을 고려하고 있는 당신에게

플랜 B의 역설과 공학적 해석에 대하여

  항간에, 결혼이란 '결국 혼자된다'라는 것을 뜻한다는 웃지 못할 얘기가 있다. 이런 믿을 수 없는 농담을 근거로 이혼을 정의하자면, 이혼이란 '이제 혼자되었다'라는 씁쓰레한 은유로 남지만, 그 의미는 극단적 배신감을 수반하는 실질적 결별이자 홀로서야 함의 비장함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극단적 배신감이란, 비단 배우자의 외도 만을 지칭하지 아니한다.  특히 인격적, 경제적, 사회적(이건 가족을 의미한다.) 가능한 한 모든 요건을 포함하기에  일차원적 일리가 없다.

  각설하고, 독설일지는 모르되 결혼을 '문화적 음모'라 칭한다면 이혼은 '신빙성의 테러'에 해당한다. 경험상 필자의 주변에서 파악한 결과, 테러가 60% 음모가 40%의 수준으로 평가한다.

  음모건 테러건 따질 것도 없이 두 사건은 전적으로 당사자간 상호 자유계약의 원칙에 의거 합의한 공동협정이자 또한 계약이니 만큼 이러쿵저러쿵 구분을 짓는다는 것은 허튼 말장난에 불과하다. 현행법상 이혼을 전제로 하는 결혼계약이란 원인무효에 해당하므로 전적으로 말장난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연애는 기쁨이자 환희 일지는 모르되, 결혼이나 이혼은 실존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처절한 실존을 언급하도록 한다.


  이혼이란 비선형적 부조화를 맞이할 경우 결정 가능한 최상의 해법일 수 있다. 누구의 삶이 되었건 개인의 일생에는 만만치 아니한 굴곡이 있음은 거부하기 어렵고, 미지수가 딸랑 한 개인 y=ax+b 와 같은 선형 방정식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 기왕에 풀어도 해가 없을 수 있는 비선형 으로 치환하여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도 있다. 장고 끝에 던지는 악수처럼 최후의 결정이란 마치 엎어진 물과 같아 되담을 수 없는 치명적 오류가 될 수 있음을 입체적으로 숙고해야 할 이다.

  무릇 인간이란, 보편타당하게 너, 나 할 것 없이 상황에 따라 이기적인 자세를 취하는 존재라서 스스로 정당함을 찾고 싶어 하는 각각의 자유의지가 있다. 본인의 사상이 파괴되거나, 상호의 신뢰가 이미 붕괴된 시점이라면 누구나 자유의지인 이혼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플랜 A이던 결혼이 사랑이라는 자유의지로부터 비롯되었다면 플랜 B인 이혼 또한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하니 허튼소리는 집어치우고, 당신의 자유의지가 그렇다면 틀리지 않았음에 반드시 이혼해야 함이 옳다.


  지금껏 내가 만나 본 이혼 전문 변호사들은- 독자들께서는 이 대목에서 자를 오해할 필요는 없다. 저자법공학을 기반으로 기술 판단이나 기술 중재 또는 감정 평가 업무를 수행해 온 터라, 별의별 각종 사건을 전담하는 변호사들과 협업하는 처지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다.- 이혼 사건을 의뢰하는 당사자들에게 한결같이 질문하기를, 끝내도 되는 시점이 분명한 지의 여부를 반드시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질문하고 재삼 확인의 단계를 거친다. 이 시점에서 법정대리인을 위임한 당사자가 잠시라도 망설인다면, 돈에 눈이 뒤집힌 변호사일망정 한 사람의 인생을 법리로만 해결할 수 없기에 책임의 귀착으로 인한 대리인 본인의 현명한 실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건의 수임 여부와 성공보수 인과관계를 따져가, 의뢰인의 망설임 이상으로 고민한다. (웃기는 건, 변호사인 그들도 배우자와 이혼한 경험을 지닌 대다수라는 점이다.) 배우자가 있던 없던 법조인을 떠나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

  따지고 보면 이혼은 결혼의 강성(剛性)을 능가하여 훨씬 피곤한 통과 의례이다. 적어도 결혼을 의미 있게 진행하였다면, 이혼 또한 결혼 이상으로 유효한 의미를 부여해야 함이 타당하다고 판단한다.(그렇다면 이혼식도 필요할까?) 결국 이 에피소드의 결론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언급했던 내용을 비틀고 편집하여 허튼 쓰레기 해법을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은 독설이 된다.

  '이혼해 보라 후회할 것이다! 이혼하지 말고 버텨보라 그리하면 더욱더 후회할 것이다!'

  남에게 속는 것보다 자신 스스로에게 속임을 당하지는 말아야 한다. 세상은 무조건 당신의 것이고, 당신만의 인생 또한 그 어떤 조건의 제시가 불가한 오롯이 당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하는 의무나 책임의 범위를 떠나 존엄성을 지닌 인격체는 어느 누구의 판단으로부터 편집당할 수 없으므로, 개 꼬랑지만 못한 선배나 동료의 자격으로 절대 조언을 할 수 없다. 엄연히 제삼자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알려진 플랜 B에는 자신마저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고육지책의 험난한 계락이 숨어있다. 그래서 플랜 B는 절대로 쉬운 선택이 아니다. 여기에는 공학적 차원의 외력(外力)에 의한 내력(耐力)의 스트레스가 필수로 수반되는데, 이름하여 이것을 응력비(Stress ratio)라 칭한다.

  본시 공학적 의미의 응력비란 안전율에 역수를 취하여 Sr=1/Sf x 100(%) 형식의 백분율로 표현하는데, 만약 응력비가 100%를 넘어서는 경우라면 구조물은 이미 파괴 한도에 도달해 있다는 뜻이 되고, 강체인 재료를  대신하여 인간을 대입시키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여 미쳐 날뛰기 직전의 상황으로 판단하면 된다.

  혹여 당신이 플랜 B를 고려하고 있다면, 예측 불가의 충격대응이 가능한 내력을 키워 응력비를 감쇄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막중한 스트레스 장애로 하여금 뇌세포에 영구 변형이 올 수도 있다.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효 둔화의 현상으로 당연히 자연 치유케 되겠지만, 문제는 당장의 압박감(스트레스)이다.


  지금은 과거와 다르게 뜻이 맞지 않거나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른 배우자와 억지로 사는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자녀나 가족의 만류, 경제적, 사회적, 혹은 체면문제 따위의 외압을 감수하며 버티는 사람에게도 그만한 이유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언 이랍시고 함부로 뱉어내는 말에 전혀 책임 따위는 지지 않는 제삼자의 헛소리는 참고하지 않음이 타당하다. 단 한 번뿐인 본인의 인생에 절망하지 않고 책임에 충실할 수 있다면, 망설임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하나 일말의 호혜나 양보 의지가 먼지만큼이라도 잔존한다면? 과감하게 차선인 플랜 B와 결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당신의 선량한 인내를 요구함이 아니다. 플랜 B와의 결별 사유가 이해건, 용서건, 동정이건, 자비이건 그 어떤 현란한 형용사를 동원한들 절대로 무의미하다. 다만, 그것 만이 당신을 포위하고 있는 심연의 늪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검증된 사실은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다. 구속이나 외력이나 모멘트가 없다면 스트레스가 존재할 수 없는 동등가 응력(Equivalent stress)처럼, 기대이상의 거대한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면 거대한 불행이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적지 아니한 경험상,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처절한 자기표현으로 살아 본들 인생 참 별거 없습니다.  고스톱 판의 깨평만큼 담담(淡淡)하고 소소(小小)하게 느끼는 행복이 최고입니다. 이 글을 마주하고 있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당신의 선택이 어떠하든 당신의 앞날에 찬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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