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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Sep 22. 2022

잔인한 결별에 대하여

플라스틱과 면도날의 함수관계

  14세기 영국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였던 오컴 윌리엄 으로부터 나온 선택의 방법으로 면도날의 선택이 있다. 논리를 철학적 견지로 평가하면 치사하지만, 공학적 배꼽(태생) 근거한 경제성 논리로 보자면 감탄할 만한 수준이다. 의 저서에 나온 말을 한마디로  응축시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필요 없이 복잡하게 만들지 말 것!".

  비록 오컴이러한 면도날 원리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를 빈번히 사용한 참고 문헌과 역사적 배경의 근거가 있다. 어떤 현상이나 원리를 표현하기 위한 논리구조에서 쓸모없는 비약, 전제, 논거 따위들을 과감히  잘라내라는 선택의 방법을 나타내는 집약된 용어가 바로 오컴의 면도날이다. 

  원래의 의미는 완성된 논증 간에 어떤 것이 더 나은 설명인지를 묻는 허접한 질문에서 나왔다. 두 가지의 명제 중 둘이 모두 참임이 이미 증명되어 있을 때, 증명으로서 가치는 둘다 동일하다. 여기에서 오컴의 면도날은 비로소 의미가 있다 즉, 허튼짓을 하지 말고 지름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과학은 이제 오컴의 면도날로 표현되는 필연성이 결여된 개념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들이 믿고 있는 영혼이라는 개념을 강력히 부정한다. 그 증거로 고등 생명체에 있어서 가장 잔인한 결별이란, 뇌세포가 서서히 굳어져 종당에는 기억을 상실하고 마는 치매이다. 치매는 제 스스로 인식이 불가능하되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영혼에 관한 모든 믿음과 허튼 증거들이 말끔하게 사라진다. 그런 까닭에 두뇌로 생각을 한다고 믿느니, 차라리 그런 생각들의 경험을 생성해내는 것이 두뇌라고 믿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판단이다. 이것이 바로 오컴의 면도날적 해석이다. 당신이 비록 지금 치매의 상태가 아니라도 이 현상이 복잡하여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가? 나 역시 섣부른 오해의 소지가 있는 쉬운 이해를 원치 아니한다.


  공학적 개념으로 플라스틱(Plastic)이란, 유연성의 물질이나 또는 나긋나긋함의 뜻으로 쓰이며 그렇게 통용이 된다. 이를테면, 딱딱함이나 취성을 뜻하는 브리틀(Brittle)의 반대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플라스틱이 고분자 화합물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지구의 생태계를 걱정하는 환경론자들이 얘기하는 플라스틱의 미래는 칙칙하고 어둡기만 하다.
  인류가 만들어 온 무릇 어떤 발명품도 그렇듯이, 당초 개발 당시의 플라스틱은 꿈의 신소재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 이르러 플라스틱이란 전적으로 지구 환경파괴의 주인공으로 낙인이 찍혀 커튼콜로 재 등장하여 의심이 팽배한 오명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에너지의 확산 유동에 따른 무질서도의 팽창이라는 물리학의 기본 법칙이지만, 공학자의 견지에서 보자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인간을 포함하여 이 지구상에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과 인위적으로 생산된 현존하는 모든 것들에는 그 개체가 탄생되는 배경은 물론이고, 입출력의 인과율에 따라 공학적 폐해에 절대적으로 지배받는 존재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과연 과학기술만이 능사이고 또한 만능일까?

  놀랍게도, 우리 주변의 고분자 화합물인 플라스틱의 분자고리가 깨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잉여 물질인 다이옥신이, 신진대사를 행하는 거의 모든 고등 생명체에 치매를 유발하거나 또 촉진시킨다는 사실은 이 분야의 과학기술자를 제외하면 알고 있는 사람이 흔치 않다.  

  안다는 것이 때로는 불편함의 도를 넘어 차라리 모르는 것보다 못한 거지같은 경우도 다. 일컷되 이를 식자우환 이라고는 하지만 기우(杞憂)마냥 절대로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가? 날카로워 보이지만 무딘 오해다. 그대가 없는 하늘이란 존재한들 의미가 없고, 존재할 수도 없기에 진실로 하늘은 언제 어느 때이건 폭삭! 무너질 수 있다. 누가 되었건 소유한 기억과 잔인한 결별의 상황을 마주할 수 있겠지만, 정작 당사자인 본인그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당신의 뇌에 별도의 연산장치(CPU)와 보조기억장치(HDD)를 물리적으로 이식하지 않는 다음에야... 씁쓸하게도 이건 허튼 정보가 아니다.

  푸른 지구별의 이유없는 지배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인간천적은 인간이 만들어낸 유용한 플라스틱이 아니라 그것을 오남용하는 우리 자신 뿐이다. 나를 포함하여  지구와 지구인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옳은 방법임은 이미 알고 있는 처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거불능현실적 상황을 핑계로 옳은 방법이라는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나는 매일 나의 얼굴과,사상과, 번민과에 면도질을 하고 있지만, 또 매일 플라스틱을 사용하고 온통 이것들로 뒤덮여 있는 도회지의 주변을 개미처럼 바삐 서성인다. 결별은 시나리오에 있으니 처참하건 잔인하건 그 따위 기억의 상실쯤이야 두렵지 않다. 그러나 이 순간 총총한 나의 기억들을 악랄하게 차압하고 있는 이 빌어먹을 컴퓨터나 휴대폰 따위의 보조기억 장치들을 패대기치고 싶다. 그리하여 내일이면 어쩔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고적한 광야가 그리울 따름이다. 이 얘기는 광야에서만 외쳐야하는 모노로그일까? 참으로 비루한 핑계이자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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