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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Sep 18. 2022

일요일에는 거지 차림새로

앙뒤망쎄(Endimanché) 유감

  입은 옷이 수려하다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는 의미인 '옷이 날개'라는 속담이 있다. 이건 우리에게만 해당치 않고 전 세계를 막론한다. 서구 문화권에 회자하는 '옷이 사람을 만든다(Clothes make the man)'는 것은 속담이 아닌 정설이다.

  불어인 '앙뒤망쎄(Endimanché)'  관습의 일종이자 지역문화로 유구히 존속해온 지 오래이. 이 말은 심지어 구글링으로도 찾을 수 없고, 그들(파리지앵) 문화권 밖이라면 좀처럼 해석이 불가능하다. 해독이 불가한 이 '앙뒤망쎄'굳이 억지스럽게 우리말로 해석을 하자면, '일요일에는 가장 멋진 옷을...' 어쩌고에 해당한다. 이는 재미있게도 문화적 이질감의 차이가 아닌 정서적 다름의 묘미에 해당한다.

  야외 나들이나 조문, 또는 혼례의 참석 등과 같은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적어도 우리 한국인은 휴일이나 일요일 만큼은 거지 차림새(?) 일색이다. 집안에 틀어박혀 쉬면서 피곤하게 의관을 차려입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인 들은 이와 반대로 별다른 행사가 없을 망정 일부러 일요일에 최고의 옷을  입는다. 뭣하러 그 미친 짓을 할까?라는 의심스러운 질문을 던질만하다. 이런 현격한 문화 차이를 쉽게 이해하려면, 인상파 화가 중에서 독특한 점묘 기법으로 친숙한 조르주 쉬라의 작품인 '그랑자트의 일요일 오후'라는 작품을 보면 어렴풋이 짐작 가능하다. 

조르주 쉬라 '그랑자트의 일요일 오후'

  이 걸작은 무려 130여 년 전의 회화작품이지만, 작중 인물들의 복장을 세세히 살피자면 입고 있는 매무새의 분위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개중에는 반팔 차림새의 인물도 있고, 뛰노는 아이들도 보이건만 대체로 등장인물들이 챙겨 입은 복장만큼은 예사롭지 않다. 인상파의 회화가 대부분 그러하듯,  그림은 작가의 상상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풍속화에 해당하는 매우 사실적인 묘사이다.

  문제는 13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인 지금까지 이런 전통이 남아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절대왕정의 시대이던 앙시엥 레짐을 붕괴시킨 단초를 제공하여, 귀족과 평민의 계급 평준화를 이룩한 시민혁명을 지나 바야흐로 시간이 흘러 한 세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애석하게도 '앙뒤망쎄'의 미풍양속은 점차 퇴색하여, 지금은 마치 우리가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 장롱에 묵혀둔 한복을 챙겨 입는 수준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더러 소수의 프랑스인들은 아직도 이 풍습을 자랑스럽고 고집스레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지만 딸이 소녀시절 무렵 파리에서의 에피소드이다. 파리 시내 퐁피두 센터 지하철 입구에서 깨끗하고 멀쩡한 귀부인 차림새의 숙녀가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연신 구걸하는 모습을 난생처음으로 경험한 딸이 호기심에 나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아빠! 저 아줌마는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으응...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저 아줌마는 지금 구걸중이고 직업이 거지란다. 차림새가 말끔하지 않고 지저분하면 구걸을 해도 여기서는 통하지 않거든? 특히 오늘 같은 일요일에는 더 우아하고 패셔너블한 차림으로 정중하게 구걸을 해야만 그나마 소득이 있지."

"예쁜 차림으로 차라리 일을 하지 창피하게 구걸은 왜 해요?"

"글쎄다?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저렇게 차려입고 구걸하지는 않았을 거야. 상대방에게 혐오감을 제공하지 않고 말끔히 적선을 요구하니 저것도 일이라면 일이고 직업이라면 또 직업이지..."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딸의 낯빛이 점차 우울해지던 것을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호기심 많던 소녀의 감성으로 지켜본 낯선 유럽의 풍경과 문화적 충격을 일일이 제 아빠에게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짐작 커니와, 그 후로도 여러 번 있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알고 있던 뻔한 상식이 뒤집히게 되면, 이해의 폭은 전도된 상식에 비례하여 유연하게 변해감을 나 역시 수많은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바 있다. 단순히 옳거나 그르다는 차원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섣부른 오해이기도 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다. 문화는 오로지 문화로 이해함이 타당하다는 판단에서 그렇다. (그렇기는 해도, 잘 차려입은 고상한 집시를 나는 여태 본적이 없다. 물론, 파리 시민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지만...)

  일요일이면, 그냥 거지 차림새로 매캐한 연기가 작렬하는 분위기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행위보다, 거룩한 정장 차림새로 마치 다도(茶道)를 행하듯 우아하게 와인을 음미하는 상황이 좀 더 멋스럽게 보일지는 모를 일이다. 그것이 그들만의 고급스러운 문화일 망정, 나는 그들의 불편함을 절대로 흉내 내고 싶지 않다.


  아일랜드산 흑맥주인 기네스를 기네스에서, 토스카나 지방 명품인 키안티를 키안티에서, 카프리에서 카프리를 마셔보는 재미있는 짓거리를 이미 죄다 경험을 해본 터라,(오호라? 얼핏 더듬어 보니 삿포로에서 삿포로를 마신 기억도 었군...) 

  적어도 휴일에는 그냥 거지 차림새로 바지를 걷어붙이고 다리 털을 숭숭 내보이며, 불판에서 자글자글 익어가는 고소한 삼겹살에 쌉살한 소주 한잔을 쥐어박는 즐거움! 소박하고 촌스럽지만 그 이상의 확실한 행복은 없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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