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유효기간

지쳐버린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하여

by 하이경

가을에는 편지를 쓰겠다는 책임감 없는 단순미래형 어구가 있다. 반드시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서 쓸 수도 있고 또 쓰지 아니할 수도 있다는, 거 말하자면 순전히 자기 맘대로의 독백인 샘이다. 계절로 따지자면 지금은 봄이라서 쓰겠다던 편지를 기다릴 시기는 아니지만, 나는 누구인지로부터의 편지를 하냥 기다리고 있다. 내가 언제부터 편지를 기다려 왔는지 시점을 기억할 수 없지만, 나에게 편지를 쓰겠노라는 지나치는 이야기조의 약속 이행을 언제고 기다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받은 편지가 없으니 하염없을 따름이다.


지켜졌다면 이미 그것은 '약속'이 아니며, 지킬 수 있으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만이 오로지 '약속'의 진정한 의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차원으로 슬쩍 비틀어 바라볼 때 약속의 해석은 온전히 달라질 수 있다.

비록 지켜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약속'이 아닌 것이 아니듯, 지켜지지 않았거나 지킬 수 없었던 '약속' 또한 '약속'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건 궤변이 아니다. 벗기 위하여 옷을 입듯(이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면 입기 위하여 옷을 벗는가?) '약속' 또한 반드시 지켜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약속'이란, 지켜질 수도 깨트려질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그것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박제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약속'이란 시점의 이전과 이후의 시공간을 연계하는 통로이자 터미널이기에, 그것의 의미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문득 튀어 오르는 기억의 탄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는 암흑에너지가 될 수 있고, 초시공의 기나긴 터널이기도 하다.

만약에 그것이 지켜졌다면, 약속의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흥미진진하고 이쁜 한 가지의 약속을 나는 여기에 공개하도록 한다. 그 당시 그러니까 이십 대 초반에 무심코 저지른 약속이지만, 그로부터 삼십몇 년을 더하고 또 몇 년을 이미 넘긴 지금까지도 미완으로 남아있는 그 약속의 내용은 이러하다.

매해의 마지막 날, 경춘선이 지나치는 어느 역사에서 이행하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뾰족이 거기 그 장소라는 제한적 공간은 특별히 지정하지 않았으므로, 여객 대합실이나 역사의 벤치 주변 어디쯤이었을 터이고, 약속시간 또한 오후 한 시부터 굳이 몇 시까지로 제한 두지는 않았으되, 적어도 자판기 '뽑아커피' 석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시간 동안만큼만 상대를 기다려줄 것. 그리하여 서로 만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비록 상대방을 만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말 것. 언제까지 그곳 거기에서 상대를 기다리건 혹은 아니건 그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이며, 애초에 약속 이행을 위하여 춘천행 열차를 타고 있을망정, 그 순간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기차에서 내리지 말 것...

지켜지지 아니한 약속도 분명한 약속이고 이것은 판도라의 무엇과 동질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나는 '소망의 잔존'보다 '머피의 법칙'을 더욱 신뢰한다. 전자는 신화지만, 후자는 과학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요번 가을에는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써서 게으른 우체통에 부쳐야겠다.


어느 해 마지막 날에 나는 춘천행 열차를 탓었고, 차창 밖으로 당신을 보았지만 차마 그 순간 열차에서 내리지 못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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