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반디 앤 루니스

죽어야만 다시 살아나는 법

by 하이경

비정 하지만, 설계수명이 다한 모든 것은 죽어야 다시 사는 법이다. 힌두교 3대 주신 중에서 시바는 파괴의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바는 파괴만을 전담하는 광폭한 신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를 담당하는 신이기도 하다. 나는 이 수수께끼를 좋아한다. 왜 죽어야만 사는 걸까?

문헌에 근거하면, 석가모니는 인도의 토속(민족)종교인 힌두교 3대 주신인 브라마, 비슈뉴, 시바를 비롯하여 다신교를 표방하던 모든 잡신들을 엑스트라로 취급하여 깡그리 무시했던 장본인이었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있는 생로병사 문제야 말로 그에게 숙명적인 의문이었음은 물론이다. 당시에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신나게 파괴하고 또 슬그머니 창조를 전담하던 시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바의 존재를 아예 무시한다면 사멸 이후 내세의 극락이나 지옥 그리고 영생 따위들은 실로 하찮은 명제에 불과 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이, 만물을 피조하였다는 브라마 신이 만약에 존재한다면, 왜 시바는 이따위 거지 같은 순환논리의 엉성한 질서를 만들었는지 스스로 반문하여 '그건 아니다'라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으며, 고뇌의 정점에 이르러 터득한 '그건 아니다'의 다른 버전인 소위 벗어남(해탈)의 우주론을 수립하고 나름의 세계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이념이자 곧 교리이다.

이는 절대로 위험한 발언이 아니다. 역사적 배경이나 기록된 근거를 동원하여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상을 분석하자면, 그의 직관적 통섭(깨달음)은 유아독존을 전제한 무신지론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의 상대적이자 절대적인 무신지론으로 다듬어진 석가모니의 교리는, 브라만교의 베다경전을 기초로 완성한 힌두교와 전혀 상반된 교리를 지녔기에, 그 때 당시에는 좌시당했고, 그가 태어난 지역이자 본향인 인도의 북부에서 마저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배격되었다. 그 당시 석가모니의 파격적인 사상은 신흥 종교로서의 인정은 고사하고 상당히 푸대접을 받았지만, 기존의 질서와 모든 신들을 거부한 그의 범우주적 사고방식은 한정된 지역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지구로 전파되어 인류를 매혹하기에 충분하였다.

오늘날에 이르러, 시바신을 능욕하였던 그의 사고방식은 전 세계를 통틀어 거의 3분지 1에 달하는 막강한 지지를 얻게 되었는데, 알고 있다시피 이름하여 이것이 붓다이즘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은 섭생의 고리를 벗어나면 반드시 도태되어 소멸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일찍이 세존께서는 이런 상식을 파괴하여 독특하고 색다른 방법을 인류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건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공포감을 벗어나 영생을 바라며 또한 그것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심리를 빠르게 파악하여, 브라만과 힌두의 교리를 슬쩍 차용한 소위 '아트만' 여기에 대입하고, 섭생을 영위하던 기간 동안 당사자가 저지른 '카르마'(업보)로 재순환하여 환생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세존 자신도 신의 존재를 과감히 무시하고 또 거부하였지만, 영생불사의 존재인 '아트만'과 이승의 업보인 '카르마'는 인정을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은 이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흔히 알고있는 불교의 '윤회론'이건만, 이는 본시 토속 종교이던 브라만교와 여기에서 파생한 힌두이즘이 지니고 있었던 근본적 사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존은 이러한 '윤회론'의 테마를 과감히 통편집하여, 인간들이 극복 가능한 현상으로 탈바꿈 시킨다.

육신은 비록 해체 되더라도 영혼은 영생불사 하므로, 필시 업보의 고통을 치뤄야하는 원초적 두려움에 떨고 있을 가엾은 인간들의 형편을 고려한 나머지, 윤회로부터 탈출 가능한 비상구를 마련하였고, '깨달음'으로서 세상의 모든 번민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라는 대책과 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른다.

살고 죽는 것은 일련의 과정이며,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여 무한 순환을 반복한다면, 모름지기 시작과 끝의 회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해방이나 구원이란 아무래도 요원할 따름이다. 열반 이전의 세존께서 전파하였던 수많은 설법의 온전한 주제는, 일반사람들이 깨우치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단히 심오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지럽고 시끄러운 악다구니판의 사바를 벗어나려면 해탈의 경지를 이룩하는것 즉, '깨달음'이 곧 길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와중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노라! 어쩌고 악을 쓰며 선량한 중생들을 기만하는 사이비들과, 거짓말을 밥먹듯 일삼는 엉터리 사기꾼들이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도록 항하사의 매듭과 무량대수의 '깨달음'에 관한 수수께끼를 마련하였다. ('금강경'이나 '화엄경'을 참조하면, '깨달음'은 곧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로지 무념, 무상, 무위, 무극의 순수한 초자아를 지닌 '깨달은자'로서, 사바세계의 거듭된 환속 인연으로부터 벗어나 극락의 열반에 이른자는 세존자신 즉, 장본인이었다. (석가세존 만세!)

극락정토나, 초자아의 성찰이나, 궁극의 자유마저 실존주의자이자 과학기술자인 나로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런 말장난을 별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의 주제는, 석가세존의 설법 중에서 티끌에도 우주가 있다는 '일방무량방'을 앞세워, 채워짐의 현상에서 허덕이다 제 수명을 다한 반디 앤 루니스라는 이름의 책방이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 저 자신 한치의 앞날도 모르면서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주절대는 점장이마냥 사바세계의 생사여탈만이 궁금할뿐, 헤아릴 수 없는 광명이나 헤아릴 수 없는 무극의 수명 따위는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무아미타불..... (상상력을 좋아하는 인간들이 창조하였을 뿐, 원래 창시자 석가세존마저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관세음보살'은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