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아내의 쿠데타에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하고, 서먹함에 버무려진 숨 죽은 파김치처럼 하루하루를 긴장으로 대처하던 와중, 선배와 함께 대포 잔을 기울이다 이런저런 신변의 얘기를 전했더니만, 그 양반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으음... 듣자 하니, 혼인의 순결을 의심받고 있다는 매우 치명적인 얘기 아닌가? 한 가지만 묻겠네, 그런 사실이 전혀 없는 건가? 아니면 들킨 사실의 은폐가 필요한 건가?"
"억울하게도 전자입니다. 바람이나 피웠으면 억울하지는 않겠지요. 아시다시피 제가 그럴 만한 열정이 있는 나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군... 나 역시 적지아니 당해 본 처지의 경험이 있는터라 대처할 방법이 있긴 하네만, 근데 그게 말이지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라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만... "
"책략을 일러주시면 반드시 필터링은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을 비워 버리시게! 이를테면 공성계를 써서 성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초연하게 성루에서 거문고를 뜯어보라 이 말이네. 그러면 안사람이 당황해서 한발 물러서거나 아니면 휴전을 제안할 수도 있을 걸세."
"그러니까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써먹었던 유명한 계락인 공성계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렇지 않아도 당분간 어디로 잠수를 좀 탈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예끼 이 친구야! 치사하게 잠수는 무슨... 그렇게 어설프게 대처하면, 더 큰일 날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니 신중해야만 하네. 신뢰는 말이지, 특히 부부간의 신뢰는 한번 틈이 가면 회복이 어려울 수도 있거든..."
"잠수를 망설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치사 무쌍한 방법이 되겠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연주할 수 있는 거문고도 없고, 뜯을 비파도 없습니다. 피리를 불까요...?"
그로부터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지만, 아내와 내가 서먹한 건 매양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업무상 해외출장이 계획되어 있던 터라, 냉전 중이던 아내에게 달랑 손편지 한 장을 남기고 서둘러 출장길에 올랐다. 선배의 조언대로 신뢰회복을 위한 공성계를 구사할 겨를도 없었으며, 시기상 비상구가 절실히 필요했던 나는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는데, 그건 예전부터 꼭 한번 방문하고 싶어 하던 장소가 출장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좋다! 일을 빨리 마치고, 며칠 여유가 생기면 요번 기회에는 꼭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들러 보리라...'
그러나 제아무리 신멸 한 계획일 망정 정해진 방향을 벗어나 어쩌다 삐딱선을 타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출장에 함께 동행하였던 K 사장은 떠나올 때의 약속과 달리 분주한 영업스케줄 소화에 여념이 없었다. 문제는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지만 킬리만자로 등반에 배정해둔 아까운 내 자유일정까지 덤터기로 뽀개 먹고 있었던 처지였다. 그러다 보니 내가 보유한 자유시간이라야 겨우 이틀밖에 없었고, 기대하고 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처지라서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때 K 사장은 내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고 묻기에, 사실 여유가 생기면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요번 기회는 아닌 것 같다고 대답하니, 그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양형도 조용필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현혹당한 영락없는 보통의 한국인이 맞는 것 같소. 계획을 3일간으로 잡았다면 그건 당치도 않습니다. 정상까지 완등 하려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소요되니 말이지요. 그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등반 전문가도 꼬박 4박 5일이 소요됩니다. 더구나 양형은 흡연자이고 게다가 골초가 아니요? 그거부터 자격 미달입니다. 킬리만자로는 중턱이라 해도 그 고도는 해발 3,500m쯤이니 특히, 흡연자는 저 폐활량의 산소 부족으로 인한 호흡 곤란으로 등반 내내 토악질만 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말 겁니다. 등반 시 기후조건도 물론 중요하지만.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당시의 컨디션이나 사소한 문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듣고 보니 내 계획은 근본부터 문제가 있었던 거로군요? 그런데 히말라야도 아니고 일주일 씩이나...?”
“최소한의 시일이 그렇다는 거고 재수 없으면 더 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상까지 도전하려면 세르파와 가이드의 도움은 필수가 됩니다. 물론 별도의 비용이 드는 건 당연하고요. 혹시 다음 기회에 거길 가시더라도, 등반길 도중 가이드에게 표범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 마세요. 만약에 그런 질문을 하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을 할 겁니다. 당신은 필시 한국인이 분명하고, 당신들은 여기에 오면 꼭 표범은 어디에 있느냐고 한결같은 질문을 하는데, 표범? 여기에 그런 것은 없다고 답을 할 겁니다. 아하하…!”
"그 말인즉슨,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거짓말이라는 겁니까..?"
"그럴리야 있겠습니까마는, 상식적으로 먹이사슬이 있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생태계의 특성상, 표범의 행동반경을 한참 벗어난 상위 고도에 표범의 표적이 될 만한 먹거리가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글짓기를 업으로 삼는 작가들의 연출일 가능성이 큽니다."
"히야...! 속았다는 이 느낌, 으스스합니다."
기록에 근거하면, 1926년 해발 5895m 높이의, 킬리만자로에 오른 영국 탐사대가 정상 부근에서 표범의 사체를 발견하고, 증거로 표범 귀를 잘라왔다는 기사 내용이 잡지에 실리게 된다. 동시대에 유명한 작가 헤밍웨이는 탐사대가 남긴 이 기사 내용에 감명을 받아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소설을 집필하였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나 한국인 가수 조용필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를 발표하는데, 이름하여 그 노래가 바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이 유행가는 극작가 양인자 씨가 노랫말을 짓고, 그의 배우자인 작곡가 김희갑 씨가 곡을 붙여 완성한 노래인데, 장중하면서도 처연한 분위기의 노랫말 출처는 헤밍웨이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을 기반으로 창작한 순전히 허구라는 것이고, 더 기가 막히는 사실은 작사자 본인 양인자 씨 자신도 눈 덮인 킬리만자로를 가본 적이 없노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씁쓸한 진실이 아니 수 없다.
일주일을 훌쩍 넘기고 출장지에서 돌아온 나는 아내가 또 엉뚱한 시비를 걸어온다면, 일전에 선배가 내게 일러주었던 공성계의 전략을 구사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 아내는 나에게 볼멘소리를 섞어 이렇게 얘기했다.
"이제껏 살면서 그렇게 안 봤더니, 당신 참 못났다. 아니면 아니라고 구구절절 변명이라도 할 일이지. 꼭 그렇게 달랑 편지한 장 써놓고 일언반구도 없이 사라져서 내 속을 썩여야겠어? 다 팽개치고 짐 싸서 감쪽같이 사라질 사람은 바로 난데..."
"여보! 내 쓸데없는 변명보다, 나는 당신이 내 무관심으로 인하여 우울증에 걸리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러니 나를 포함하여 우리 주변의 신뢰 관계를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을 했던 거지, 무책임하게 도피할 생각은 없었거든. 아니! 내가 이쁘고 착한 마누라를 두고 어딜 도망간다는 말이오? 이쯤 해서 오해가 풀렸다면, 술이나 한잔 합시다."
"오해? 오해가 풀린 건 아니고, 술상은 차려 올 테니, 어디 당신의 그 구차한 변명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아 참, 당신 말이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
"이 양반이 정말...?"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하이에나는 짐승의 썩은 고기가 좋아서 찾아다닐 리 없고 다만, 표범처럼 싱싱한 고기를 사냥할 방법이 요원했을 따름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표범도 하이에나도 생존을 위하여 상대를 도륙(屠戮)하여 육식을 한다는 점에 있어서 전적으로 둘은 동질이다. 따지고보면 나는 그들보다 훨씬 상위의 포식자임에도!
일전에 선배가 언급했던 공성계의 비유를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들과 딸은 다 장성했으니, 양육비 다툼은 의미가 없을거고... 좋다! 이 집을 포함하여 내 명의로 된 모든 동산과 부동산을 당신에게 전부 명의 이전을 하겠다. 다만, 내 몸만 자유롭게 두면 안될까...?"
이 대목에서 긴장하지 않을 아내는 없을것이다. 아마 이리 생각할지도 모를일이다.
"으음... 몸뚱이만 자유롭게 해달라고? 저 인간에게 뭔지 분명히 있긴 있군! 뭐지..? 다시 시작하고 싶은 뭔가 있다는 얘긴가?내가 싫다는 얘긴가...? 딴 여자가 생겼나...? 그게 아니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