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데 초반 계간지를 발행하던 잡지사에서 현역 시인들을 대상으로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을 조사했는데, 압도적 지지로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는 노래가 바로 '봄날은 간다'였다. 어지간한 싯구 이상의 품질을 지닌유행가의노랫말들이 부지기수 였으므로,일견 생뚱맞다고 판단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를 인수분해하여 찬찬히 뜯어보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여,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로 마무리되는 이 유행가 가사의 압권은 1절에 등장하는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에 있다고 본다. 연분홍치마가 휘날리는 대목까지는 여인의 저의가 드러나지 않고 있건만, 애먼 저고리의 옷고름을 왜 잘근잘근 씹어 뜯어야만 하는가에 공연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모르기는 해도 언제 어느 때 다시 돌아오마는 상대방의 실없는 그 기약에 몇 번의 봄날을 속절없이 보내야 했을 처자의 애터지는심정이 퍽이나 절절하다.
전란 중 피난처 부산에서 발표되었다는 곡 답지 않게 가사 전체의 분위기는 피곤한 전쟁통임에도 불구하고 사뭇 서정적이면서도 애틋하기만 하다. 아무리 노래가사 일망정 3절에 등장하는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어쩌고 하는 대목은지금의 시대와 견주면 다소 거리감이 없지 않다. 스물아홉이나 서른아홉은 어쩌라고...? (게다가 요즘에는 마흔아홉, 쉰아홉도 부지기수 인데...)
겨울의 끝자락이자 생명의 움트림이 시작되는 봄은 잔인한 계절이다. 언제 왔다 갔는지도 애매하여 기지개를 켜다 보면훌쩍 가버린 흔적만 남아있기 때문이고, 격정과아픔을 잉태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모든 것들은 이합집산(離合集散)이고 회자정리(會者定離)이니 흩어졌다 모이는 계절이 봄인 까닭이다.
"..... 라면 먹고 갈래요? 자고 갈래요?"
기막힌 선택의 여지를 내재한 이 대사는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의 영화 속 대사인데, 여자가 자신의 아파트에 손님으로 든 남자에게 던지는 그러니까 발단의 단계를 떠나 스토리 전개의 시작을 시사하고 있는 썩 의미 있는 한마디이다. 화려한 예고편 속에서 이 기상천외한 여주인공의 유혹성 발언 대사에 홀딱 반한 내가 한참 오래전 아내에게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함께 보러 가자는 제안을 하였더니만, 나의 제안이 별 재미가 없었는지 아내는 시큰둥하게 이렇게 답하였다.
"봄날은 간다고요? 흥미 없어요... 아마 그 영화는 봄날이 가는지 어쩐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보러 갈 거예요. 특히 타이틀 컨셉이 진행형이라서 더욱 재미없어요..."
아내에게 봄날은 이미 가버리고 없다는 얘긴지, 그래서 가는 봄날을 어쩌라는 얘긴지 내심 찔끔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제기랄! 나이를 먹어 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낄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맑았던 시야에 느닷없이 날파리가 두어 마리 날아다니더니만 튼튼하던 시력이 가물가물 시들어 감을 느낀다거나,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가 애매하게 몸의 상태가 작년 다르고 올해가 다름을 실감한다든지 하는 따위이다.
세월 속에서 망가져 갈 수밖에 없는 대표적 징후인 하드웨어적 증상이야 그렇다고 보지만, 문제는 소프트웨어적 병폐가 보다 더 심각하다. 이를테면 사물을 접하는 감정이나 그 느낌, 또는 어떠한 현상의 이해 따위가 서슴없이 시큰둥해진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접하는 사건도 웬만큼 거대한 사건이 아니면 관심사의 범주에 들지도 않을뿐더러 웬만큼 자극적이지 않으면 도대체 반응마저 없을 만큼 껄적지근 시큰둥하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지인이 저승으로 줄행랑을 쳤다는 소식을 접할 경우 과거라면충격이었건만 지금은 오히려 무덤덤하기도 하고, 더구나 작고 소소한 기쁨까지 기억에서 몰아내려는 속성마저 생기기 마련인 모양이다. 또 오거나, 내가 없더라도 줄기차게 오는 봄날이 간다는 게 뭐 그리 아쉬울 건 없지만 정작 나에게 봄날은 이미 가고야 말았을까? 까짓 거 봄날이 가야만 여름이오고 가을도 오는법이니...
만약 내가 '봄날은 간다'는 제목의 영화감독이었다면, 그 명대사를 다음과 같이 시큰둥하게 수정하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