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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빛창가 Oct 27. 2022

첫 만남

소설연재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설마... 내가 미친 여자처럼 노는걸 다 봤을까? 아 쪽팔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Hello..”


‘헐.. 영어잖아..’


“He... llo...”


영어 울렁증인 난 그가 영어로 말을 더 시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척 재빨리 눈길을 피했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그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왜 자꾸 날보고 웃는 거야... 심쿵하게...’


그는 모델 같아 보였다. 190cm는 넘어보이는 큰키에 검은 웨이브 머리, 짙은눈썹, 흰피부, 그리고 신비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반가워요. 저 한국말할 수 있어요.”

“어...(다행)... 잘하시네요...”

“Thanks... 왜 여기 혼자 있어요? ”

“네... 그러게요... 이 시간에 이런 차림으로 참 이상하죠?...”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오늘... 회사 땡땡이쳤어요...”

“땡땡이...? 땡땡이 뭐죠? ”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아... 회사 그냥 안 가는 거... 가기 싫어서...”

“ Oh... I got it...”   

  

꿈같은 일이라는 건 정확히 이럴 때를 말하는 것 같다. 평소라면 회사에 있을 시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변에서 이런 멋진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근데...무슨 향수지? 넘 좋다...’


그에게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시크하면서도 바다를 닮은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향이었다. 나는 사람을 기억할 때 그 사람의 향기와 함께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 첫 남자 친구는 폴로 스포츠. 두 번째 남자 친구는 캘빈클라인. 세 번째 남자 친구는 버버리. 우연히 그 익숙한 향기를 맡을 때면 그때의 기억들이 같이 소환된다.     

그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Hey... 혹시 바쁘지 않으면 오늘 하루 나와 데이트해줄래요?

“네?? 데...데이트요? ”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당황하는 나를 보자 웃으며 말했다.


싫으면 거절해도 돼요. 여태까지 거절당한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 마음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뭐야... 왕자병이야...치!...어쩌지... 멋있고 잘생기긴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데이트라니... 요즘 세상에...근데...여기는 여행지니까...좀 더 과감해져도 되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용기를 내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무엇보다 그의 향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비과학적인 판단이지만) 그쪽 눈빛을 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네요. 뭐.. 좋아요...”     


그는 다시 내게 미소를 보냈다.  


‘으... 제발 그만 웃었으면...미치겠네...


우리는 해변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브런치를 함께 먹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상큼하고 달콤한 사과잼과 크림을 곁들인 와플, 갓 구운 스콘,아보카도를 곁들인 신선한 연어 샐러드... 파도소리...그리고 그의 향기로운 미소...모든 게 좋았다.     


‘신기하네... 나 진짜 낯가림이 심한 사람인데... 이 남자 뭐지? 아주 오랫동안 알던 사람 같아....’


식사후 커피를 들고 해변을 걸었다. 잠시였지만, 날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에 언뜻 슬픔이 비추었다.


‘뭐지... 저 눈빛은....’


“I'm Mark. 영국에서 왔어요.”

“네... 어쩐지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았어요. 제 이름은 현수예요. 지현수”

“예쁜 이름이네요... 사실 난 당신이 바닷가에 왔을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어요.”   

  

‘날 지켜보고 있었다고?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저를요?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무서운데요?”

“그런가요? 하하”     

“근데 혹시 직업이 모델이에요?”


큰 키에 작은 얼굴, 웨이브있는 검은머리, 긴 팔다리,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눈, 누가 봐도 모델 같은 외모라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검은 니트에 베이지색 바지의 심플한 차림이 었지만 어느 패션 모델 보다도 스타일리쉬해 보였다.


“You mean a model? 하하... No... 아니요... 그런 말은 가끔 듣기는 하지만... ”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헉.. 뭐지..) 그렇군요. 전 평범한 회사원이에요.

오늘은... 출근하다가 갑자기 뭐에 홀린 것처럼 그냥 바다로 향했어요.  근데 처음 해보는 일탈이지만 너무 신나고 좋네요...


 “Good for you... 규칙을 어기는 건   재밌죠... 난 어제 한국에 왔어요. 영국에서... ”

“그렇군요. 한국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러나 마크는 대답대신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저... 혹시 와인 좋아해요? 난 이 해변을 좋아해서 자주 오는 편이에요.

근처 와인바가 있는데 함께 갈래요?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남자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시했던 적이 있었나 스스로에게 놀라면서 그에게 제안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슬퍼 보이는 그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것도 병이다! 나에겐 몹쓸 동정심이 너무 많다. 그것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Really? 좋아요. Thanks. ”     


와인바에는 마침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샤스 스플린'이 있었다.   

  

‘아... 이 향기 너무 그리웠어....’    

 

조용히 눈을 감고 향을 음미했다. 과일향과 깊은 오크향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 와인의 뜻이 '슬픔이여 안녕'이라고 해요.

혹시 슬픈 마음이 있다면 이 와인으로 위로가 되면 좋겠어요.”   

  

그는 흠칫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기하군요... 이 와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와인인데...


우리는 조용히 건배를 했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이따금씩 나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왜 또 저런 표정을 지을까? ’


그의 향기가 와인향과 함께 섞여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그 순간에 충실하기로 했다.


갑자기 그의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Hello?..OK. Good... Thank you”


그는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혼자 앉아 있는 동안 지금까지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짜릿한 일탈, 멋진 남자 그리고 와인....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래...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 데로 하자.’     


“Hey... 현수... 혹시 요트 탈래요?”

“요트요?”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갑자기 고민이 되었다.

      

단둘이 요트를? 그래도 낯선 사람인데... 괜찮을까?’


“저... 요트는 처음 타보는데 위험하지 않겠죠?”

“지금 내가 위험하냐고 묻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하”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내 생각을 적나라하게 들킨 것 같아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찌 됐건 그가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요. 그런데 어제 한국에 오셨는데 언제 그런 걸 준비하셨는지 신기하네요.”

“사실 여기 친구가 살고 있어서 부탁했어요.”     


택시를 타고 부두로 향했다. 부둣가에 하얀색의 크고 아름다운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이리 와요...”     


그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손이 참 따뜻했다.    

 

“고마워요..”     


요트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한눈에 봐도 고급 요트임이 분명했다. 테이블에는 간단한 스낵과 '돔 페리뇽'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졌다.     


‘돔 페리뇽이라니... 세상에... 이건 분명 꿈이야...이 사람 뭐지...?’      


“요트가 맘에 들어요? 나한테 좋은 와인 선물을 해준 게 고마워서 나도 선물을 하고 싶었어요.”

“맘에 드는 수준이 아니에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항상 이런 식으로 순진한 여자 꼬시는 거 아녜요?”

“No.. No...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난 그런 타입은 아니니까.”     


그는 요트를 능숙하게 조종했다. 한참 바다로 나아 간 후 주변이 잔잔해지자 그는 가만히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하늘이 점점 노을로 붉게 물들어 갔다. 우리는 향기로운 샴페인 향에 취해 노을 지는 바다를 함께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향기와 바다의 짠내음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벚꽃향이 뒤섞여 퍼져갔다. 그를 슬며시 보니 그의 눈은 먼 바다를 향해 있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우연한 만남이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궁금해졌다. 스쳐가는 인연일까? 아님 운명적 만남일까? 하지만 지금은 복잡한 생각은 멈추기로 했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 카르페디엠!

해가 저물어가자 우리는 부두로 돌아왔다.


“현수, 혹시 오늘 꼭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면 나와 내 친구네 집에 같이 갈래요?

내 집은 아니지만 숙박료는 무료예요. 친구에게는 이미 부탁해 두었어요.

어때요? 혹시 부모님께 허락받아야 하는 건 아니죠?”

“네!? (오늘 여러번 절 당황시키시네요...)”      


그는 당황하는 나를 보며 그는 또다시 미소 지었다.     


“아... 니예요...!! 전 이미 성인인데... 무슨... 좋아요... 가요... 가...”     


미쳤다. 오늘 처음 본 남자와 외박이라니...

하지만 부모님 허락을 받아야 하냐는 그의 말에 욱해서 나도 모르게 가겠다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혹시 이 남자 수법아냐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함께 그의 친구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의 집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벚나무와 작은 연못, 그리고 예쁜 꽃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정원이 있는 모던한 곳이 었다. 입구에서 그의 친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당연히 그와 비슷한 모델 같은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친구는 근육질에 커다란 곰돌이 같은 사람이었다. 낯선사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왠지 좋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인사를 하며 내 얼굴을 자세히 보자 흠칫 놀랐다. 나만이 알 수 있는 아주 미묘한 떨림이었다.


“어.. 어서 오세요. 마크 친구 준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는 셰프였다. 우리를 위해 근사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무척 편안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테이블에서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영국으로 유학 갔을 때 마크를 우연히 만났는데 낯선 영국 땅에서 마크가 항상 큰 힘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저녁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지금까지 먹어본 스테이크 중 최고였어요. ”

“현수씨는 말을 참 이쁘게 하시네요. 여기서 마크와 남자끼리만 먹으려니 삭막했는데 현수씨가 와주시니 정말 재밌고 저희가 더 고맙죠~”


그는 흐뭇한 눈으로 나와 마크를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현수씨는 이 방을 쓰시면 돼요.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에요. 잘 자요.”     


준은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배려해주었다.     


“고마워요. 준 씨 ”     


준이 내려가고 나서 마크와 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Good night, 마크..”     

“Good night, 현수...”


그는 싱긋 미소 지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 방에는 바다가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문을 열자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주위는 고요하고 파도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준과 마크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God! She is... really looks like her...”

“I doubted my eyes when I first saw her ”

Right. 'Cause I'm surprised too”

    

‘무슨 말이지? 내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지만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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