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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빛창가 Oct 27. 2022

프롤로그

소설연재


“잠시만요! 기다려요. 당신 누구예요...!”     


드디어 그녀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띠띠띠띠.... 띠띠띠띠....”    


알람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깼다. 며칠째 같은 꿈이다. 어두운 숲길에서 긴 생머리에 보라색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나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쫓아가면 어느새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오늘은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잠에서 깨었다. 


도대체 누굴까? 왜 같은 꿈을 꾸는거지...’     


다시 알람이 울린다.


‘아... 5분만... 아니... 1분만...

안돼... 일어나자 지현수....’     


겨우 눈을 떴다. 어느새 햇살이 침대 모서리까지 다가왔다. 창문 틈으로 제법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이따금씩 펄럭인다. 봄이구나...어디선가 옅은 꽃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창문을 통해 무언가가 날아들어와 코끝에 살짝 앉았다.


“음? 이게 뭐야. 벚꽃잎이네...”   


창문 밖으로 활짝핀 벚꽃이 어렴풋이 보인다. 분홍의 탐스런 꽃송이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몸이 더더욱 나른해진다. 그러다 문득,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헐... 벌써 7시잖아!!”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 회식 끝나고 감자탕까지는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속아파...”  


온몸이 천근만근에 속은 울렁울렁했다. 서둘러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난다. 언제나 처럼 집 앞 분식집에서 김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직 따뜻하다.


분식집을 지나 조금 가다 보니  '폐인 아저씨'가 합류했다. 나 혼자 붙여준 별명이다. 매일 우중충한 회색 잠바에 머리가 까치집이다. 그에게선 매일 술냄새가 난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서면 커피 향이 나기 시작한다. '저승사자'가 합류할 시간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커다란 가방을 메고 올블랙, 흰 양말, 삼선 슬리퍼 차림이다. 3년째 수험생 차림이니 아마 그가 계획한대로 잘 풀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화장품 가게를 지날즈음 '눈썹녀'가 또 눈썹을 반쪽만 그린채 나타났다. 나머지 반쪽은 어디서 그릴까? 미니스커트에 킬 힐을 신고 뛰어오는 모습에 불안 불안하다. 그 바쁜 와중에도 가방과 신발은 매일 다른 걸 보면 참 신기하다.


3년째 마주치는 우리는 아는 것도 아닌 모르는 것도 아닌 애매한 사이다.


‘저 사람들에게 나는 무슨녀라고 불릴까? 김밥녀?? 아마 내 존재도 모를지도 모르지... ’  


오늘도 같은 플랫폼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린다. 다들 어디로 향하는 걸까? 매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 보면 어느새 서울역에 도착한다.


서울역 출구로 향하는 길에는 항상 지린내가 난다. 첫 출근 , 지린내와 함께 지하철역 바닥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노숙자라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실제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혹시나 게 중에 위험한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겁이나 바닥만 보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매일 봐도 이상할 것 없는 익숙한 풍경이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바닥을 보며 회사를 향해 힘없이 걸었다.


지하철 입구를 막 빠져나오자 갑자기 돌풍 같은 바람이 '휘익~' 하고 불어왔다. 그 순간! 사람들의 머리 위로 수천 개의 벚꽃 잎이 함박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머나!!”

“와~너무 예쁘다!”     


사람들이 멈춰 서서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1초.

2초..

3초...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잠시 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빠르게 각자의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이상하게도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느닷없이 가슴속으로부터 무언가가 울컥하며 올라왔다. 그냥 회사로 들어가기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진다.


‘아... 어디론가 확 떠나고 싶어...오늘 그냥 땡땡이 칠까? 니가?...미쳤어...말도 안돼지...’


늘 상상만 하던 일이다. 평생 범생이로 살아온 난 결국 오늘도 회사로 향하게 될것이다. 같이 내린 사람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 우르르 나왔다. 지하철 출구에서 고개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다들  이상한 듯 흘끔흘끔 쳐다보며 피해 갔다.


‘가지 말자! 회사!’


오랜 고민끝에 드디어 굳은 결심을 하고 지하철 입구를 바라보며 뒤를 돈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등을 밀어 몸이 휘청거렸다. 거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아야...!”     


그 순간, 뭔가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무작정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강릉행 기차표를 끊고 있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혼자 중얼거렸다.  


진짜 가는 거야? 미쳤구나 지현수...!”     


휴대폰을 끄고 좌석에 앉았다. 드디어 기차가  출발하자 심장이 요동쳤다. 큰 사고를 치고 어른들의 처분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주 묘한 해방감에 휩싸였다.   


기차는 어느덧 강릉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아야진으로 향했다.


아야진..

그곳은 이름만 들어도 왠지 모를 설렘이 밀려온다. 아야진에 도착 하자마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들고 무작정 바닷가로 향했다. 투명한 코발트색 바다에서 비릿한 소금 향기 났다. 모든 게 완벽하게 좋았다.


해변엔 아무도 없었다. 평일 오전이라 해변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하이힐을 손에 든 정장 차림의 여자라니...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으니 온갖 잡생각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날아갔다. 대신,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지금 나 잘 살고 있는 거겠지? 근데 잘 사는 게 뭐지? 이게 잘 사는 건가? 그래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내고 있잖아.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렇게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불현듯 바닷물을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조심스럽게 투명한 바닷물에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커다란 파도가 밀려왔다. 눈앞에 보이는 파도였음에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했다.


‘으악...’     


바닷물에 하얀 블라우스와 스커트가 흠뻑 젖어버렸다. 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크하하하하하..... 아... 이게 뭐야... ”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젖은 김에 신나게 물놀이를 하기로 했다. 파도 뛰어넘기, 모래성 만들기, 이름 크게 쓰기 등... 꼭,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와... 진짜 신난다...!!’


몇 년 만에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바람결에 상큼한 오렌지와 바다향이 섞인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어... 향수 냄새네? 누... 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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