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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빛창가 Oct 27. 2022

타임캡슐

소설연재

달콤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전혀 예상치 못한 그와의 만남은 평범한 나의 일상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침대에 누워 그와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이런 설렘...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또다시 월요일...

같은 시간 알람 소리와 함께 다시 똑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뭐야...연락한다더니... 그냥 인삿말이었나봐...’  


그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아쉽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참기름냄새, 폐인아저씨, 커피향, 저승사자, 반쪽눈썹...여전히  똑같은 사람들과 만원 지하철에 시달렸지만 일상이라는 프로그램에 뭔가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하루가 왠지 설레고 기대되었다. 물론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지. 현. 수 대리! 정말 놀랬어요. 무슨 대단한 사정이 있었던 거겠죠? 그러겠지. 설마!!”     


팀장에겐 늘 '샤넬 No.5' 향이 난다. 그녀는 샤넬 마니아다. 항상 예의 바른 것처럼 보이려는 스타일이라 목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소리 지르는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우아한 말투로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했다.     


“팀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예요? 무단결근이라니 하하하... 나 첨 봤어 이런 경우. 황당하네 정말. 초등학생이에요? 하루 종일 연락도 안되고. 나원 참. 개발사에서 연락 안 된다고 계속 전화가 와서 팀장인 내가 직접 처리하느라 덕분에 바쁜 금요일을 보냈네요. 나 심심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나 항상 현수 씨 뒤치다꺼리하느라 하나도 안 심심해. 알아요?  내가 지현수 씨에게 크게 기대한 적은 없는데 이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인지는 몰랐어요!”     


팀장은 노골적으로 나를 싫어한다.

나에 대한 팀장의 적대적 태도는 작년에 내가 팀장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한 이후 시작되었다.

작년 이맘때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였다. 신규 앱 개발을 위해 개발업체를 선정해야 했다. 보통은 공고를 통해 여러 업체를 모집 후 개발비용, 개발 능력 등을 다각도로 비교해 보고 공정하게 선정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됐는지 공고가 나가기 전부터 우리 팀이 신규 앱을 개발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 업체 사장이 팀장을 자주 찾아왔다. 그즈음 팀장의 가방과 신발이 신상으로 바뀌었다. 팀원들 사이에선 그녀가 모종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게 아닌지 하는 소문이 돌았다. 월급으로 사기엔 너무 비싼 제품들이었기 때문이다.


팀장은 담당자인 나에게 업체 선정과정을 조작해 그 업체를 뽑도록 지시했다. 자신이 잘 아는 회사이며 실력이 있는 회사라고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가 책임을 물게 되므로 나는 팀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공정하게 비교하여 다른 업체에게 개발을 맡겼다. 그 후 팀장은 날 대놓고 무시하며 주요 업무에서 배제했다. 팀원들은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나를 데면데면 대했다. 다시 한번 사회생활의 씁쓸함을 느꼈다.     


“어휴. 도대체... 후배들이 뭘 배우겠어!! 다들 따라 할까 봐 무서워...

뭐하고 서있어!!  빨리 가서 밀린 업무 처리해주세요!”

“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자리로 돌아가서 주변을 둘러보니 팀원들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급하게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점심도 거른 채 일을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힘든 하루였음에도 버스 유리창에는 엷은 미소를 띤 내 얼굴이 비추어졌다.

    

‘어떤 사람일까? 마크는 ’


그와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문자가 왔다. 마크였다.     

     

‘ 현수, 내일 저녁 시간 있어요? 내가 회사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        

‘ 꺅!! 드디어 연락이 왔다!! ’     


너무 기뻐서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심장이 두근거려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가 진짜 나에게 다시 연락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물론 간절히 바라긴 했다. 하지만 설렘과 함께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다시 누구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예전의 그 사람과 헤어진 뒤부터는...         


다음날 마크와 만날 생각에 일찍 눈을 떴다. 평소와 다르게 항상 묶었던 머리도 풀고 화장도 정성껏 했다. 아끼는 원피스에 가장 좋아하는 향수 '르빠 로 겐조'를 뿌리고 회사로 향했다. 팀 동료들이 와서 한 마디씩 했다.   

  

“어머, 현수 대리 오늘 소개팅이야? 왜 이리 신경 쓰고 왔어?”

“네? 아니요. 그냥요. 봄이잖아요.”     


평소 명품가방 하나 없는 나를 은근히 깔보던 동료들이었다. 서둘러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가슴이 더욱 뛰었다. 계속 그의 연락을 기다리며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그에게 전화가 왔다.     


“현수, 나 당신 회사 앞에 와있어요. 지금 내려오면 돼요”

“네.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밖으로 나가 이리저리 둘러보며 마크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딘가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빠앙~”


난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보았다. 차에서 마크가 내리며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 마이..... 갓! ”     


그가 몰고 온 차는 노란색 람보르기니였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서 주변을 살폈다. 때마침 퇴근하던 동료들과 마주치자 다들 큰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현수 대리~~~~!!! 저 멋진 남자 누구야? 남자 친구? 우와... 설마 아니지..?

저차 봐 차... 람보르... 와.. 진짜..”

“꺅!! 뭐야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네. 그게 저...”     


마크는 날 향해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두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 Hello... 현수 데려가도 되죠? ”

“ 네... 네... 당연하죠!! 꺅!!”     


팀 동료들은 서로 마주 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차에 타자 그는 빠른 속도로 도심을 빠져나왔다.     


“서울에 언제 왔어요? ”

“현수가 가고 바로 왔어요... 저도 서울에서 일을 하게 됐거든요. 한국에 온 것도 일 때문이에요.”

“그렇군요... 솔직히 저에게 연락을 또 할 줄 몰랐어요....”

“음.. 왜요? 현수는 내가 한국에서 아는 유일한 여자인데... 하하”

“(에이 설마...) 그래요? 기분 좋네요. 근데 마크는 한국말을 정말 잘해요... 외국인 같지 않게...”

“어머니가 한국인이에요.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도록 교육하셨어요.

내 절반은 한국인이라는 걸 항상 잊지 말라고 하셨죠.”

“우와.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이윽고 차는 어느 호숫가에 멈추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Sorry, 내가 설명도 안 하고 데리고 왔군요. 이곳은 내가 보물을 묻어둔 곳이에요”

“보물이요? 보석이나 금 같은 거 말인가요? 영화에 나오는...?

제가 훔쳐가면 어쩌려고요. 날 너무 믿는 거 아닌가? ”

“하하. 역시 현수 씨는 cute해요.”  


호숫가에는 작은 돌담이 이어져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벚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처음 가본 곳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왠지 낯설지 않고 포근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one, two, three, four... nine.. ten.. here...!!”     


그는 돌담에 있는 돌의 개수를 세다가 한 장소에 멈춰 섰다. 열 번째 돌 밑에 검은색 흑요석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는 차에서 작은 삽을 가지고 와서 그 흑요석 밑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상자가 나타났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녹슨 철제 상자였다.   


“그게 뭐예요? 귀여운 상자네요.”

“타임캡슐이에요. 내가 10살 때 이곳에 어머니와 같이 왔었어요. Mom’s loves here. 우리가 함께 온 기념으로 타임캡슐을 묻자고 했어요. 내가 가진 물건들과 어머니의 물건들을 함께 묻었어요. 그 후 20년이 지난 지금 처음 열어보는 거예요. 이걸 열어보는 게 한국에 오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아니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저랑 함께 해도 되는 거예요? 어머니랑 함께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She passed away last year.”     


그의 눈에 눈물이 살짝 비쳤다.   

  

“어머.. 마크 정말 슬픈 일이 있었군요...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를 안고 위로해주었다.


“상자 안 열어 볼 거예요? 너무 궁금한데...”

“좋아요. 함께 열어봐요.”     


상자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장난감 권총, 구슬, 트럼프, 솔방울, 빛바랜 몇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들(앞에 있는 물건들 때문에 사진은 자세히 안보임) 그리고 목걸이 그리고 반지가 들어 있었다. 하트 모양의 목걸이 안에는 한 여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빼어난 미모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은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She is my mother ”

“와...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Yes, She was. 어머니는 아름답고 사랑이 많은 분이었어요...”     

     

해가 점점 기울어져 갔다. 돌담 위로 올라가 앉아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여기 넘 예뻐요! 근데 왠지 낯설지가 않네요...”


넓은 풀밭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가득 피어있는 그곳은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마크와 같은 눈높이에서 눈 맞춤할 수 있어 좋았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벚꽃잎들이 사방에서 날리기 시작했다. 날리는 벚꽃을 쳐다보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크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거려 나역시 눈을 뗄 수 없었다. 점점...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헉... 뭐지... 설마...난 몰라..’  


난 너무 떨려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입술이 닿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예상치 못한 키스였다.


‘두번째 만남에 키스라니 넘 빠른거아냐...아...’


하지만 이미 생각보다 감정이 앞서 도저히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봄밤 달빛 아래 그의 숨결... 그의 향기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입술을 뗀 후 마크는 나를 살며시 안아 돌담 위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내려다보았다.     


“내가 실수했다면 사과하고 싶어요. But I like you so much...”

마크, 나도 당신이좋아요. 근데 조금만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요. 영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요...”

“OK... 천천히... I got it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나에게 다가오는 걸까? 내가 한눈에 반할만한 미녀도 아니고 화려한 스펙을 가진 것도 아닌데...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나 날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마크. 나는 최근에 너무 힘든 사랑을 끝냈어요. 그래서 혹시 그냥 호기심에 나에게 다가오는 거라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과 헤어지고 죽을 것 같이 아팠거든요. ”

“현수. 절대 나는 당신을 장난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I'm serious. 어떤 상처가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잊게 해주고 싶어요.”

“그럼 약속해줘요. 나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그럼 나도 조금씩 맘을 열어볼게요. ”

“OK. Trust me! ”     


굿 나이트 키스를 나누고 그와 헤어졌다. 정말 마법 같은 하루였다. 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도 약속해요. 당신을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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