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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빛창가 Oct 27. 2022

그 사람, 강태성

소설연재


강태성과 헤어진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 사람과 나는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다. 출장차 갔던 프랑스 파리의 드골 공항에서 터미널을 잘 못 찾아 헤매고 있을 때 그가 다가왔다.


“한국인이세요? 무슨 문제라도?”

“네... 제가 타야 할 비행기가  제2터미널이라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공항은 처음이라...”

“마침 저도 거기로 가는데 저를 따라오세요. 여긴 공항이 굉장히 넓어서 셔틀이나 전철을 타고 터미널을 이동해야 돼요.”

“그렇군요. 너무 감사해요...”     


그는 승무원과 유창한 영어로 몇 마디 나누더니 나의 짐을 들어주면서 에스코트해주었다.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이라 그런지 반가운 마음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었다.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 어? 자리가....”     


신기하게도 그는 바로 내 옆자리였다.   

  

‘뭐지... 이런 우연이...’

“와... 신기하네요. 옆자리라니... 우리.. 운명인가?”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에게서는 버버리향이 은은하게 났다. 게다가 세련되고 매너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설레었다.  


“출장 왔어요?”

“네... 독일에 출장 갔다가 파리를 경유해서 오는 길이에요.”

“그렇군요. 어쨌든 반갑네요. 저는 출장이 하도 많아서 이제 공항이 너무 익숙해요.”     


그는 나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한국으로 오는 내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름은 강태성, 나이는 31세, 세광그룹 전략기획팀이고 영국에서 경영학 공부를 했었다고 했다. 한국에 도착하자 그는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 난 전화번호가 아닌 email을 알려주었다.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전화번호를 알려주긴 싫었다. 그는 살짝 놀란 듯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곧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그에겐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나도 프로젝트 초기라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메일이 왔다.      

    

    안녕?

    나 기억해요?

    공항에서 당신을 구해준 사람... 하하..

    전화번호 안 줘서 삐졌어요.     

    좋은 글이 있어서 보내드립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 공항에서 만난 멋진 남자로부터     


그 후 그는 한 달 동안이나 매일 좋은 글을 하나씩 보내주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메일을 기다리게 되었다.그러다 어느 날부터 메일이 오지 않았다.하루 이틀이 지나고 삼일째 되던 날 걱정되는 마음에 그에게 처음으로 메일을 보냈다.

          

    바쁘신가 봐요?

    매일 아침 보내주신 글 잘 받았어요.

    이제는 글을 안 보내주시는 건가요?

    기다렸는데...     


그러자 그에게 바로 답신이 왔다.     


    제 메일을 기다렸다니 기분 좋은데요^^

    제가 일본으로 출장을 가서 메일을 보낼 수

    없었어요. 이번 주말에 혹시 시간 되면 같이

    영화 볼래요? 제 연락처는 010-xxx3-27xx

    에요. 연락처를 안 주셔서 제 번호를      

    알려드립니다.     

    추신: 제가 진짜 싫지 않다면 꼭 ~ 연락 주세요^^     


위트있는 데이트 신청에 결국 난 그에게 연락했고 주말에 만나 영화를 같이 보게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었다.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은 전부 나와 같은 학생이었다. 다들 착하고 풋풋했지만 친구 같고 어쩐지 어린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반면에 그는 매너와 품위가 넘치고 모든 일에 능숙했다. 어른 남자로서의 매력을 그에게 처음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삶의 목표도 뚜렷했고 철저한 자기 관리에 무엇보다 옥스포드 MBA를 마친 엘리트였다. 스마트하고 열정이 있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한마디로 내가 존경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특히 더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너무 어리고 미숙해서 7살이나 많은 그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라져 버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와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면서 그의 다른 면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모든 우선순위가 일이었다. 나와 데이트를 하다가도 회사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는 나를 우선순위에 둘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성공하고자 하는 아주 마음이 강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모든 것을 계획에 따라 성취하는 모습을 심지어 나에게도 강요했다. 데이트 중에는 내가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류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나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데도 나는 그에게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사랑한 건 처음이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상대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 약자가 바로 나였다. 좀 더 기다려주면 되겠지...내가 좀 더 이해해 줘야지...주인만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에게 그는 너무나 큰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한 2년의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 세라가 생일파티에 우리를 초대했다.세라는 대한그룹의 둘째 딸이다.

나와는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계급의 친구지만 그녀와 나는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라 과외 알바로 겨우겨우 돈을 모아 떠난 첫 해외여행이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돌아다녀야 했기에 점심은 언제나 햄버거였다. 런던 브리지 앞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흐릿한 영국 날씨에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Help, 도와주세요. 소매치기예요...!”     


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앞으로 가려고 발을 내밀었다. 그때 여자 가방을 손에 든 남자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What the fuck!!!”     


그는 가방을 놔둔 채 날 째려보고는 욕을 하면서 멀리 달아났다.      


“정말 고마워요... 혹시 한국사람이에요?”

“네 맞아요... 저 사람 도망갔네요... 가방은 여기 있어요...”

“너무 감사해요... 여기에 여권이 들어 있어서 잃어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영국에도 소매치기가 있군요... 선진국이라 없을 줄 알았는데... 놀라셨겠어요..”

“네... 너무 놀랐는데 도와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해요. 저... 시간이 괜찮으시면 제가 맛있는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데... 함께 가실래요?”

“네, 좋아요 ~ 실은 아까 그 사람이랑 부딪히는 바람에 먹던 햄버거가 멀리 날아가버렸어요...”

“어머... 그래요? 호호호. 제가 진짜 맛있는 거 사드려야겠는데요? 혹시 숙소가 이 근처예요? 저는 영국에 살고 있어요. 유학생이에요. 방학이라 한국에 갔다 오는 길이에요.”

“아 ~ 그렇군요. 저도 방학이라 유럽 배낭여행 중에요...”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이도 동갑이고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게 되다 보니 짧은 기간에 친해지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세라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 그녀가 대한그룹의 딸인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놀랍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난 지극히 평범하게 그녀를 대해주었다. 가끔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으리으리한 내부를 보고 중압감이 들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한 배경과 상관없이 명랑하고 쾌활한 그녀가 좋았다.


세라는 주상복합 오피스텔 펜트하우스에서 혼자 살았다.파티 초대를 받고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는 동안 강태성은 무척 놀란 눈치였다.   


“현수야~ 와줘서 고마워. 옆에는 남자 친구? 안녕하세요. 임세라예요.”


태성은 깜짝 놀라 평소답지 않게 말을 버벅거렸다.    


“네... 현수 남... 자친 구인 강태성...입니다.

윤세라 씨가 현수 친구라니 너무 놀.. 랐네요.”     


세라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현수 너무 좋은 친구예요. 잘해주실 거죠?”     

“네... 그럼요... 물.. 론이죠”          


주위를 둘러보니 유명 연예인과 상류층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늘 꿈꾸던 화려한 삶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욕심이 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항상 높은 곳만 올려다보고 사는 사람이었다. 원래 그곳에 속했던 사람처럼 그는 나를 혼자 남겨둔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와인을 마시며 그런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가 세라에게 다가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세라가 그의 말에 활짝 웃었다. 그러다 그만 세라가 와인을 그의 옷에 쏟아버렸다.     


“어머 너무 죄송해요. 제가 새로 셔츠를 내드릴게요. 저희 오빠 셔츠가 맞으실 것 같아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저희 집에 오신 손님인데 제가 너무 실례를 했네요.”   

  

셔츠를 받아 든 그는 한참 동안 셔츠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프라다'였다.     


“괜찮아 오빠?”

“응, 괜찮아. 근데 너에게 이런 친구가 있을 줄을 상상도 못 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 다들 대단한 사람들이네...”

“아무래도 세라가 평범한 집안은 아니니 그렇겠지... 그래도 세라는 세라야... 엄청 밝고 순수해....”    


집으로 돌아오며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세라에게 접근하리라는 사실을....


한 달 뒤 세라는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난 첫 날 강태성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참석했다.강태성은 저번에 빌린 셔츠를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따라나섰다. 전시회는 성황을 이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누구나 알만한 유명인사들로 가득했다.     


그중에 한 작품 앞에 걸음이 멈춰졌다. 제목은 ‘고백’이었다. 세 사람의 남녀가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커플이 서로 손을 잡고있고 남자의 손을 슬픈 눈을 한 다른 여자가 뒤에서 몰래 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설마 ... 아니겠지...’     


서둘러 집에 돌아가 그 그림을 잊으려 했지만 너무도 강렬한 메시지에 압도당했다. 결국 세라는 그림으로 그에 대한 마음을 나에게 고백한 것이었다. 세라다운 방법이었다. 그날 이후 강태성은 전화도 잘 받지 않고 만남의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전화가 왔다.     


“현수야 미안하지만...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난 이제 나이도 있고 결혼할 상대를 만나야 하는데 넌 너무 어리고 우린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널 사랑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나도 쉽게 결정한 게 아니야... 정말 미안... 그동안 고마웠고... 건강히 잘 지내.”

        

처음에 그의 말을 들었을 때 그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와의 추억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그의 미소와 그의 향기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동안의 헤어짐과는 너무나 달랐다. 가슴속에서부터 고통이 느껴졌다. 난 매달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사흘...그리고 2주가 지났다.지수와 민이 번갈아가며 집으로 찾아와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달이 지나자 신문에 세라의 결혼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윤세라 평범한 회사원과 전격 결혼!’     


그 평범한 회사원은... 예상대로 강태성이었다.     

그때 세라에게 전화가 왔다.    

      

“현수야... 기사 봤지...?

나.... 너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동안 연락을 못했어...

나도 널 생각해서 그 사람 밀어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어쩌지?

너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너 너무 힘들지?

아... 난 정말 이기적인 것 같아...

근데 나도 어쩔 수 없어... 현수야 정말 미안해...”     


“난 이제 많이 좋아졌어...사람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세라야... 너에게 경고하는데 강태성 믿지 마...

야심이 많은 사람이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너에게 원망의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넌 내 소중한 친구야...

니가 다칠까 봐 걱정된다...

정말 그 사람 사랑하니?”    


“응... 난 그 사람이 너무 좋아...

현수야 나 어떻게 해...

정말 널 잃고 싶지 않은데...

그 사람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그래서 너에게 미안하지만 그 사람 선택했어...

나 용서해줘...”          


“세라야.. 세상엔 이성적으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잖아...

나도 널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당분간은 너에게 연락하기 힘들 것 같아...

그래도 네가 행복하길 빌게... 결혼.. 축하해”   


“아... 현수야.. 고마워.... 너라는 애는 어쩜...

네가 날 용서할 수 있는 때가 되면 언제든 좋으니 나에게 연락해줘.

기다릴게... 꼭...”          


강태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 원망의 마음보다는 세라가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난 동시에 두 사람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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