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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빛창가 Oct 27. 2022

영국여행

소설연재


“현수, 혹시 여름휴가 계획 있어?”   

  

마크가 다정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No... 아직 없는데... 왜요? ”

“그럼 이번 여름에 영국에 있는 집에 나와 같이 갈래? ”   

  

그가 영국행 비행기 표를 내 눈앞에서 흔들며 웃었다.   

  

‘갑자기 집에 가자니 무슨 뜻이지? 혹시...?’     


그의 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 표정을 본 마크가 웃으며 말했다.     


“Hey... 왜 그리 심각해? 그냥 편하게 생각해...

혹시 영국에서 나와 결혼식 하는 상상을 한건 아니지? 하하... 내가 살던 곳에 가자고...

Just... my place in London... 하하... So cute...”  

   

난 마크의 가슴을 한번 치고 그를 흘겨보았다.  

   

“놀리지 마요...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는 토라진 내가 귀여운지 내 양팔을 잡고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 안겨 그가 살았던 곳을 상상해 보았다. 영국식 모던함이 묻어 있는 편안한 곳일 것 같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 남자였다. 특유의 영국식 악센트와 세련된 영국식 유머가 좋았고 온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매너가 좋았다. 결국 난 그와 함께 영국에서 2주간의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남자 친구와 함께하는 여름휴가라니 생각만 해도 설레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불현듯 강태성이 생각났다. 난 항상 그가 유학했던 영국에 꼭 함께 가보고 싶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항상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참 차가운 사람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마크를 찾았다.


“현수!”  


그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나에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눈에 띄는 외모 때문인지 멀리서도 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공항의 모든 여자들이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이젠 이런 상황이 익숙할 법도 한데 여전히 곤혹스럽다. 우리를 번갈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세상에... 저런 남자랑 만나다니... 저 여자 뭐지? 돈이 많은가?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움츠려 들다가도 그의 미소를 보면 모든 것을 잊게 된다.  

   

그때였다! 나를 향해 다가오며 미소 짓던 마크의 시선이 갑자기 내 뒤에 꽂혔다. 그는 걸음을 멈추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 무슨 일이지?’

 

그 순간... 갑자기 버버리 향기가 주위에 퍼지기 시작했다. 몇 년간 내가 취해있던 그 익숙한 향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나는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내 뒤에는 강태성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세라가 있었다.   

  

“어머... 현수야...”     


세라는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불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강태성도 나를 보고 당황하며 인사했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마크를 본 순간 강태성 역시 얼굴이 굳어 버렸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혹시 둘이 아는 사이야?”     


나는 마크에게 물어보았다.     


“Bloody Hell...!!”     


마크는 갑자기 나를 거칠게 끌고 반대편으로 향했다.     


“마크, 아파 왜 이래... 팔이 아파...”     


마크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나를 끌고 걸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흠칫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현수, Are you OK? I'm so sorry... ”

“That's ok... 마크 무슨 일이야? 강태성을 알아?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Daniel... He is Daniel kang... 현수... 지금은 아무 말도 하기 싫어 Sorry...”


비행기를 탄 후 몇 시간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분명 그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 할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다행히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 마크는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보였다. 공항 출구 앞에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가 런던의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었다. 역사가 깊은 오래된 건물들과 이국적인 풍경이 신선했다.


차는 목적지인 노팅힐로 향했다. 영화 '노팅힐'로 유명한 거리가 참 예쁜 곳이었다. 드디어 도착. 차에서 내려 그의 집을 본 순간,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곳은 헐리웃 배우들이 사는 집처럼 넓은 정원과 야외 수영장이 있는 대저택이었다. 그동안 만남을 통해 그가 부자일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 수준 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여기 마크 혼자 살았어요? 세상에...”

“음...혼자 살긴 좀 크지... 청소하기 진짜 힘들어... 하하.. 너와 함께 이곳에 왔다니 정말 좋다!”     


그는 내 어깨를 감싸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집사와 메이드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Welcome. Miss ji.”


그곳이 익숙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그에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았다. 집 앞 정원에는 아주 잘 관리된 잔디가 펼쳐져 있고 집주위로 수 십 년은 되어 보이는 아름드리나무가 심겨져 있었고 장미, 튤립, 수국 등 예쁜 꽃들이 조화롭게 심겨 있었다. 


“현수가 보는 것처럼... I'm rich... super rich... 하하.. 놀랐어? 운이 좋게도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여유로운 삶을 살았어... 하지만 너와 별로 다를 건 없어... 그냥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친구들과 즐겁게 놀면서 자랐지...”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마크! 평범한 게 뭔지 알긴 해요?

어린 시절에 정크푸드 같은 거 한 번도 안 먹어봤죠? 학교 끝나면 기사가 태우러 오고....”


마크는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너무 불쌍한데.. 난 학교 끝나면 친구들이랑 학교 앞에서 떡볶이도 사 먹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불량식품들을 다 먹어봤어요... 길쭉한 스트로에 포도당을 채워 넣은 아폴로라는 것도 있었고, 주사기 같은데 설탕물을 가득 채운 것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체불명의 음식들이지만 아직 건강하니 크게 나쁜 건 아니었나 봐요. 학교 끝나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2차로 골목길에서 술래잡기, 숨바꼭질하며 밤늦게까지 놀다 엄마가 부르면 저녁 먹으러 들어갔던 기억이 나요 ”


“현수 이야기를 들으니 내 어린 시절은 정말 불행했네. 별로 놀지도 못하고 공부만 했어. 내 유일한 놀이는 승마였어...”


“그렇게 진지하게 나오니 당황스럽네요. 하하... 사실은 당신의 어린 시절이 질투 나서 해본 말이에요 ~ 부유하게 자라서 좋았겠어요. 하고 싶은 거 다해보고.... 갖고 싶은 거 다 갖고...”


그는 나의 장난에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만졌다.


“근데 아버지는 어디 살고 계셔요?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했죠.”

“아버지는 첼시에 살고 계셔. 다른 여자와.”

“음... 당신 집도 좀 복잡하구나.”

“부자들이 원래 더 복잡하지.”

“부모님은 내가 12살에 이혼하셨어. 아버지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거든.

나는 아버지 대신 형을 의지했지. 형이 나보다 7살 많거든. 다행히 어머니는 정말 좋은 분이었어.”

“그런데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신 거예요? 물어봐도 될까요?”

“차사고. 차가 빗길에 미끄러졌어.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우리는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어”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고통스런 기억을 더 이상은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크... 내가 당신을 다시 기쁘게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마크는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넌 이미 날 슬픔에서 구해줬어.”


그리고는 웃으며 내 얼굴을 감싸고 이마가볍게 뽀뽀했다.


“현수, 혹시 말 좋아해? Horse-riding 가능해?


마크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좋아해요... 대학교 다닐 때 승마 수업을 들어서 가벼운 산책은 가능해요...”

“ Good! 사실 너에게 내 말을 소개해 주고 싶거든...”

“ Wow! 말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 말 어떤지... 궁금해.. 꼭 보고 싶어요.”     


앤더슨가의 목장은 끝없이 펼쳐진 언덕에 있었다. 초록빛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십여 마리의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휘파람을 불자 말 한 마리가 다가왔다. 검은색의 윤기가 흐르고 단단한 근육질에 멋진 갈퀴를 가진 말이었다. 얼핏 보면 그와 이미지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말은 마크에 앞에 멈춰 섰다.     


“ 인사해. Thunder야. 여기서 젤 빠른 녀석이지.”

“ Hello~ Thunder. 신기해요. 당신을 알아보나 봐.  난 어떤 말을 타면 되죠? ”

“ 맘에 드는 말을 골라봐. ”     


난 말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좋은 혈통의 말들인 것 같아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한 마리의 말과 눈이 마주쳤다. 하얀색에 멋진 갈퀴를 가진 눈부신 말이었다. 그 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부르기라도 한 듯 나를 향해 달려왔다. 말이 갑자기 다가오자 좀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어 가만히 기다렸다.   

“ Hey, David, Is this horse trained? ”

     

마크는 마부에게 그 말의 훈련 정도를 물었다.    

 

“ No, Not enough. she is very tough. ”     


마크는 아직 훈련이 다 안되었다는 말에 다른 말을 고르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이 말, 이름이 뭐예요?”

“Storm.”     


마크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뒤로하고 나는 Storm을 선택했다. 마부가 안장을 올려주었고 나는 바로 올라탔다. 그러나 Storm은 내가 올라타자마자 갑자기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마치 날 테스트해보려는 것 같았다.


“아악!!”  


오랜만에 승마를 하는 탓에 자세를 제대로 잡을 새도 없었다. 마크가 놀라서 소리쳤다.     


“현수! 괜찮아? God! ”     


난 그녀와 마음을 통하고자 노력했다.  

   

“Shh... storm... calm down... That's OK....”     


속으론 무척 놀랐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말은 타는 사람의 심리를 민감하게 느낀다.

리듬을 타며 그녀와 호흡을 맞추려 했다. 그리고 호흡이 어느 정도 일치되는 순간 최대한 몸을 뒤로 젖혀 말을 멈추려 했다. 스톰은 '히힝' 소리를 내며 자리에 멈추어 섰다.     


“휴... Good girl...”     


난 말등을 두 번 두들겨 주었다. 칭찬을 알아들었는지 Storm은 천천히 내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마크와 마부는 놀란 듯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뒤에서 마크가 Thunder를 타고 따라왔다.


“현수, Wait!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Storm을 그렇게 순하게 만들다니...  


난 웃으며  을 타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 숲길로 들어섰다. 여름의 숲 속은 정말 싱그러웠다. 초록 그 자체였다. 마크가 천천히 내 옆으로 왔다. 우리는 나란히 말을 타고 숲 속을 걸었다. 말을 타고 하는 산책은 걷는 것과는 다른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말과의 호흡도 중요했고 같이 걷는 사람과의 호흡도 중요했다. 서로의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재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말 로맨틱했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난 뒤, 우리는 잠시 말에서 내려 샌드위치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의 팔을 베고 누워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여름이라 덥긴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덥고 습하진 않았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도 시원한 듯 느껴졌다.   


"어릴 때가 생각나... 형이랑 말을 타고 나와서 항상 이 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은 후, 지금처럼 구름을 보며  누워있었지. 너와 함께 하니까 더 좋아."

“ 나도 그래요. ”     


마크는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 뺨에... 그리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난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산책을 마치고 목장으로 돌아가자 한 중년 남자가 마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Dad!”     


마크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마크의 표정이 굳었다.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Mark, It's been a long time... You alive... son. uh... By the way Who is this young lady?”     

“She is hyun soo. my girlfriend.”     


마크는 내 어깨를 감싸면서 말했다. 갑작스럽게 그의 아버지를 만나 당황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인사했다.  

   

“Hello, Nice to meet you.”     


마크의 아버지는 악수를 하면서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어쩐 일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는 마크를 데리고 헛간 안으로 갔다. 그와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와 헤어지고 마크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

“Nothing special... 너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셨어. ”     


하지만 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걸 보니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다음날 아침 런던의 유명한 명소에 나를 데리고 가주었다. 우리는 빅벤, 런던 브리지, 국회의사당 등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리니치 천문대로 향했다. 내가 특별히 부탁한 장소였다.     


“도대체 그리니치 천문대는 왜 가겠다는 거야?”

“시간이 시작되는 곳이잖아... 학교 다닐 때부터 정말 가보고 싶었어...”

“하하.. 정말 특이해 현수...”     


그리니치 천문대는 언덕에 위치했다. 천문대에서 나오자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보니 템즈강과 런던 시내가 훤히 보였다.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드디어 시간의 시작점 앞에 섰다.     


“우와... 너무 신기해... 정말 있구나...”     


교과서에서만 보던 본초자오선을 실제로 보니 마냥 신이 났다. 본초자오선 옆에는 세계 여러 도시들의 이름과 그 도시의 경도가 쓰여있었다.     


“여기 있다... 서울... 경도 127도 ”     


마크는 그런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 웃었다.     


“마크, 지금 몇 시예요?”

“음... 지금?  2시 59분”


“8월 24일 오후 3시 1분 전 당신과 난 여기 같이 있고 당신 덕분에 난 항상 이 순간을 기억하겠군요.”


“wow... 멋진 말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아비정전’에 나오는 대사예요. 나와 함께한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해줘요.”


마크와 나는 언젠가 다시 이곳을 함께 오기로 약속했다. 어느새 하늘은 노을로 붉게 물들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에 기대자 그의 향기가 내 몸을 감싼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오로지 향기로만 그를 느끼고 기억하고 싶다.


“마크... 당신 향기가 너무 좋아요.”  

     

그 순간 그와 함께 보았던 첫 번째 노을이 생각났다.


‘이 향기 때문이었지. 낯선 남자와 요트를 타고 낯선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유가. 그런데 모든게 왜이리 순조롭지? 이래도 되나... 난 항상 그게 문제야. 행복한 순간에 불행한 결말 상상하기. 


그리니치를 떠나 우리는 다시 노팅힐로 돌아왔다.


“현수, 오늘 저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예약해두었어. 근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어.”

“뭔데요?”

“음. 니 어떤 옷을 입어도 내 눈엔 항상 예쁘지만, 영국엔 격식 있게 입는 걸 요구하는 레스토랑들이 있어. 오늘 가는 곳도 그런 곳들 중 하나고. ”

“알겠어요. 그것도 일종의 문화니까 존중할게요. 그럼 우리 쇼핑하러 가요.”


우리는 명품 거리로 유명한 본드 스트리트로 갔다. 거리에 유명 브랜드의 상점들이 쫙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평소 명품이라면 잘 알지도 못하기도 하고 내 스타일과 다른 옷을 입으면 왠지 어색할 것 같아

근처 빈티지 샵으로 향했다. 날 위해 언제든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있던 마크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빈티지 샵에서 옷을 고르다 보니 한 남색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심플하지만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마크! 이거 샤넬 빈티지야!! 너무 이쁘죠?”

“음. 좀 심플하지 않을까?”

“난 넘 맘에 드는데.”

“그럼 한번 입어봐.”     


드레스는 내 몸에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옷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건 앞이 깊게 파인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내 가슴에 시선이 꽂혔다. 그런 그를 보니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딜 보는 거야... 마크...!”

“아냐... 난... 그냥 옷이 잘 어울리는지 본거야...”    

 

당황하는 그를 보니 너무 귀여웠다. 그때 갑자기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내게 눈짓을 하면서 통화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거울을 보고 있는 내 뒤로 그가 다가왔다.    

 

“아름다운 여성에겐 이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는 내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촘촘히 박힌 화려한 목걸이였다.  


“마크. 이건 너무 과분한데.”

“나 때문에 영국까지 와준 게 너무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야.

너무 부담 갖지 마. 나 super rich! OK?”     


레스토랑은 은은한 조명으로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장 차림을 한 손님 두명중 한 명이 스니커즈를 신고 온 바람에 입장이 지연되었다. 직원은 손님에게 정중히 이야기하고 신발을 대여해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흔하지 않은 드레스코드라는 문화가 신기했다. 레스토랑에 온 사람들은 음식뿐 아니라 분위기를 즐기러 왔기 때문에 타인을 배려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손님은 모두 백인이었고 나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마크가 자주 오는 곳이라서 그런지 매니저는 마크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프라이빗한 룸으로 안내해 주었다.     


“여기 미슐랭 3 스타네? 정말 기대된다.”

“영국 음식 맛없는 거 알지? 너무 기대 말아.”   

  

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다르게 스테이크가 정말 부드럽고 맛있었다. 식사 중에 셰프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난 깜짝 놀랐다. 그는 TV에서 자주 봤던 영국의 유명 셰프였다.    

 

“Mr.Anderson, You've been here for a long time. Is everything ok?”

“Yes. Thank you. Actually, I can't boast of British cuisine, but this is an exception.

That's why I brought someone dear to me here.”

“Oh. It is an honour. Have a great time”     


그 셰프가 웃는 것을 처음 본 것 같았다. TV에서는 항상 화를 냈던 것 같은데... 유명 셰프와 아는 사이라니... 마크는 정말 어떤 사람일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그가 와인을 주문했다. ‘샤스 스플린’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건배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천천히 와인향과 맛을 음미했다.     


“현수가 이 와인을 사줬을 때 좀 놀랐어. 이건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처음 소개해준 와인이야.

처음 맛본 것이라 그런 걸까? 그 후에도 좋은 와인을 수도 없이 많이 먹어봤지만 난 이 와인이 제일 맘에 들어.”

“그렇군요. 전 이 와인의 향도 좋지만 이름이 맘에 들어요. 슬픔이 사라진다니. 얼마나 멋진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슬픔이 사라졌어요?”

“음... 충분히!”     


그는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난 그위로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반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1캐럿 정도 되는 파란 사파이어에 주변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예쁜 반지였다.     


“Wow! 꼭 맞네. 안 맞을까 봐 조금 걱정되었거든.”

반지가 너무 예뻐요너무 고마워요! 마크. 근데 이 반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음... 아 맞다... 그날 타임캡슐!”

“맞아. 어머니의 유품이야. 사실 오랫동안 망설였는데. 이제 너에게 주고 싶어. 어머니가 그날 나한테 이야기했었지.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끼워주라고. 정말 운명의 상대라면 이 반지가 맞을 거라고.”     

그는 내 눈을 보며 속삭였다.     


“현수.. I love you with all my heart.”     


어떤 화려한 미사여구도 들어 있지 않은 담백한 고백이었지만 그 어떤 말보다 진실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이렇게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었나.    


불현듯 강태성과 만날 때가 떠올랐다.


“미안, 나 회사일 때문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또? 그래.... 알... 았어... 할 수 없지 뭐.”    


강태성은 늘 나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었다. 그에게 난 언제나 후순위였다. 그를 만날 때마다 항상 스스로를 가치 없는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하지만 마크는 달랐다. 나를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겨주었다. 날 바꾸려 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를 아끼고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 그의 고백으로 그동안의 모든 상처들이 온몸으로 흘러나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그리고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을 느꼈다. 나 역시 마크를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난 조용히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I love you, too.”     


그는 반지를 낀 내 손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보내고 손을 잡고 밤거리를 걸었다. 근처 공원을 지나갈 때쯤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곡이었지만 왈츠풍의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shall we...?”


마크가 손을 내밀어 춤을 청했다. 그런 춤은 한 번도 추어본 적이 없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그에게 모든 걸 맡겼다. 그는 나를 리드하며 우리는 즐겁게 리듬을 탔다. 그와 함께 하면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음악이 멈추자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어주었다. 눈빛이 마주치자 우리는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아름다운 런던의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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