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의 법 (현상, 이치, 진리 등)이 불법(佛法)이다.
그러므로 여래가 설하되, 일체법이 다 불법이니라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불법(佛法)은 정해진 틀이나 한계가 없다.
무실무허(無實無虛)라는 것이나, '무(無)~', '비(非)~' 하는 표현들이 그래서 많은 것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모든 우리들에게 작은 자유가 아니라 대자유(大自由)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인데, 불법이 정해진 틀이나 한계가 있다면 다른 종교같이 그 안에서만 부분적인 자유만 가져다줄 뿐이고, 다르거나 더 큰 것과는 충돌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해탈한 역대 대선사들을 '~스님'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스님이 아니다. 그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를 보고 불자(佛子)라고 해도 맞고, 불자(佛子)가 아니라고 해도 맞는 말이 된다. 그러면서 또한 틀린 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법이 불법이고, 불법은 흔히 광대무변(廣大無邊) 하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종교로서의 형식을 갖추다 보니까 다른 종교 등과 외형이 다를 뿐인데, 그 깊이는 무한대로서 이 세계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
그리고 그 틀이나 한계가 바로 어리석은 우리 중생, 그중에서 특히 불교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승(僧)에게서 나타날 뿐이다.
그 가운데 승려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무지몽매가 바로 무속(巫俗)과 영혼세계에 대한 차별심이다.
인과법을 항상 이야기하지만, 법을 깨치기를 바란다고 아침저녁 예불 때 부처님 앞에서 염불 하면서, 정작 그 가르침에는 등을 돌리고 있다.
인과법을 알려면 영혼세계를 알아야만 되고, 또 영혼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인과법에 의해 하나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인연이나 인과는 모두 영혼과 관련하여 작용하고 있다.
전생에 인연이 있는데, 금생에 각자 몸을 달리하여 태어났는데 왜 금생에 다시 만나 복수도 하고 사랑도 하는가?
그것은 산 사람의 영혼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과의 만남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영혼을 우리는 귀신이라고 부른다.
이 영혼과 늘 함께 지내면서 희로애락을 같이 해 온 것이 바로 무속(巫俗)이다. 비록 무속인의 의식 수준이 낮고 무속의 고도화된 체계가 세워져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일체가 불법(佛法)인 것이다. 불교의 형식에서는 천도재(遷度齋)라고 이름 붙여 귀신과 같이 지내왔다. 형식만 다를 뿐 내용은 같은 것인데, 무속은 배척한다.
법을 깨닫고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점차 이 영혼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영혼세계에 가장 높이 위치한 존재를 신(神)이나 부처라고 부른다. 영혼세계와 신(神)을 합해서 신령(神靈) 세계라고 한다.
불법을 수행한다 함은 바로 자기 존재가 본래 이 신(神)이나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찾는 것을 뜻한다.
또한 운명이나 기타 역학 등에 속하는 것을 하는 행위도 천시하고 불법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배척한다. 모두 영혼세계와 물질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생명을 놓고 작용하는 것을 알려주는 색(色)과 공(空) 차원의 중요한 지혜이다. 부처되는 법만 지혜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 세간해(세속의 삶의 이치를 보고 아는 것)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점(占) 치는 것이나 사주관상을 보는 것이 어떻게 불법(佛法)에 어긋나는가?
그 속에는 금생에 겪게 되고 받게 되는 과보(果報)와 타고난 영혼의 천성(天性)이 들어가 있다. 자기가 중이 된 것이 왜 그런지 인과도 모르면서 중을 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자기를 모르니 어찌 중생을 구제할 것이고, 자기를 모르니 어찌 길을 갈 수 있는가?
자기의 운명을 깨닫고 그 속에서 잘 살아나가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눈 딱 감고 운명이나 사주관상 같은 것을 무시하고 무작정 참선한다고 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법(法)을 무시하고 법을 모르면서 수행의 길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수많은 마장과 장애들이 자기의 운명과 더불어 영혼세계에서 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법을 모르니 당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니 망상이 너무 심하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는 것도 자기 운명에 장애가 심하면 잘 되지 않고 옆으로 새게 된다. 그러니 운명을 좀 보고 업장을 깨달아 좀 해소하고 나서 수행을 하든 뭘 하든 해야 제대로 되는 것이다.
귀신이 방해하는데 무슨 수행이 되겠는가? 중이 되면 귀신이 물러나고 운명도 물러가고 하는 등 특권이 생기는가?
그런데 법을 깨달으려면 수행을 해야 하고, 법을 모르면 수행에 큰 지장을 받게 되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선지식은 이 모순을 해소시켜 주는 분이다. 법을 가르쳐 주어 길을 잘 찾아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의식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과법은 여전히 작용한다. 상(相)을 자기로 삼아 존재하는 한 공짜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석가모니불께서 6바라밀이나 기타 많은 수행을 말씀하시면서 계(戒)를 지키게 하고 금강경에서조차 보시, 인욕 등을 강조하신 참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자기 운명을 좀 바로잡고 업장을 좀 소멸하고 나서 정진(精進)하라는 뜻이다. 그래야 제대로 되니까. 그런데 요즘은 머리 깎고 중만 되면 이것을 그냥 뛰어넘고 무조건 눈감고 정진하려고 한다. 이는 마치 다리가 없으면서 걸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다.
중이 되면 최소 3년 정도는 자기가 왜 중이 되었는지, 그리고 자기 금생에 어떤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또 자기에게 무슨 장애가 붙어있는지 완전히 알기 위해 올인해야 한다.
그렇게 기본적인 것들을 좀 깨닫고, 참회기도를 하면서, 서원(誓願)을 세워야 길을 잘 갈 수 있게 된다.
지금은 행자(行者) 시절부터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 세속의 때를 벗겨야 한다나 어쩌나 하면서, 그러는 동안에 부처님에게 세뇌되고 만다.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나오지 않고 외부에서 주입된 것은 일체 세뇌에 해당한다. 결국 자기가 왜 중이 되었는지 스스로 깨달을 시간이나 여유가 없기 때문에 중노릇 몇 년 하다가 지루해지면 엉뚱한 데 눈을 돌리게 된다.
승(僧)은 재가신자보다는 그래도 좀 나아야 하는데, 불교지식이 더 많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가 왜 중이 되고 이렇게 수행하는지 그 이유를 철저히 알고 깨치고 있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나은 것이 된다. 불교는 지식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가신자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훨씬 더 깨어있어야 승(僧)의 자격이 있다.
지금의 불교가 모든 것을 '마음'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바람에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고정화되고 학문화되고 시시하게 되어버렸다.
역대 대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부처와 영혼과 몸을 가진 삼계의 모든 생명체들의 존재를 뜻하는 대표적인 표현일 뿐이다.
승(僧)은 이제부터 영혼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올바르게 잘 받아들여 불교에 생생한 감각을 불어넣고, 법을 잘 깨우쳐 수행을 제대로 잘하면서, 무속과도 원융(圓融)하게 잘 융합하여 서로서로 자질을 높이고 중생 구제에 서로서로 도움이 되도로 일체가 좀 더 깊이 있게 되어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당도 중이고, 중도 무당이다. 역대 큰스님 중에는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바로 무당과 중의 모습을 모두 갖춘 분이다.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면서 나무아미타불을 했다. 사실 귀신을 다루는 데는 무속의 도구들이 훨씬 더 효과가 있다. 목탁과 요령도 무구(巫具)와 똑같은 기능을 하는 불교의 도구들이다. 둘 다 똑같은데 다르게 보는 차별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망상이다. 그래서 원효대사의 행을 무애행(無碍行)이라고 한다. 그 어떤 신앙과 세속의 형식과 격식, 가르침에도 걸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 설총에게 유학을 가르쳤잖은가?
천도(遷度)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사람이 문제이지, 천도재의 형식이나 이용하는 도구들 같은 것은 아무 관계가 없다. 중이 염불 하는 것이나 무당이 굿하면서 춤추는 것이나 그 근본적인 효용은 귀신이나 산사람에게 똑같다.
수호신(守護神)도 마찬가지이다. 무당에게 부처님이 수호신이 되어있는 것도 있고, 중에게 할아버지가 수호신이 되어있는 경우도 있다. 부처님이 중에게만 수호신이 되어있는 경우는 없다. 그럼 부처가 아니지. 신(神)은 오로지 그 사람의 내면에 따라, 영적 수준에 따라 수호신이 되든지 말든지 하지 그 외에는 일체 무관하다.
일체의 법 - 현상, 이치, 진리 등 - 이 불법이다.
그러니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방편으로 잘 유용하게 활용하여 지혜를 펼치는 우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