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가장 큰 몸인 법신(法身)을 자기 몸으로 삼아야 한다.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장대한 것과 같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 사람 몸의 장대함도 곧 큰 몸이 아니고 그 이름이 큰 몸입니다.
몸이 장대하다 함은 무엇을 일컫는가?
불교에서 몸, 곧 신(身)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으로서의 몸만 아니고, 몸에 따른 기(氣)의 크기, 그리고 마음의 형태와 크기, 그리고 영혼의 크기와 무게, 나아가 여래(如來)의 몸까지 통괄하여 일컫는 것이다. 여래의 몸을 상주불변의 법신(法身)이라고 한다.
이 여러 몸 가운데 개체에게는 영체(靈體)가 근본이고 뿌리이고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몸이 장대하다는 것은 여래의 몸, 즉 불성(佛性)을 제외한 모든 몸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여래의 몸은 상(相)이 없으므로 몸이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말이 처음부터 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의 몸을 무변신(無邊身) 또는 무진신(無盡身)이라고 한다. 한계가 없는 몸, 다함이 없는 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몸이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상(相)의 모든 상대적 차원에서 따지는 것인데, 그럼 무엇을 일컬어 몸이 장대하다고 하는가?
영체(靈體)와 심체(心體), 그리고 기체(氣體), 상념체(想念體)가 크다는 것이다.
크다는 것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그 사람의 그릇이 크다고 표현한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몸과 충돌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얼마나 많이 포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크기가 결정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기와 다른 마음, 다른 생각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가도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진리에 자기 몸을 얼마나 맞출 수 있는가도 역시 몸의 크기에 달려 있다. 몸이 한없이 커야만 지혜와 진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앞서 언급하신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과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바로 자기의 몸을 아주 장대하게 키우는 핵심적인 수행방편이다.
보시바라밀은 자기를 나눔으로써 자기를 극대화시키고, 인욕바라밀은 자기 몸을 금강(金剛)처럼 강하게 만들어 더 이상 축소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존재는 자기의 몸을 장대하게 만드는 것이 소원 중의 소원이라.
왜 큰 몸을 가지는 것이 소원 중의 소원인가?
바로 큰 몸과 작은 몸이 있기 때문이고, 작은 몸은 큰 몸 옆에 가면 저절로 눌리고 큰 몸에 끌리기 때문에 작은 몸이 존재의 가장 큰 욕구인 자유(自由)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수행을 해서 자기를 키워가면 되는데,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손쉽게 신(神)을 끌어들여 자기 몸집을 키우려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신은 그렇게 만만하게 자기 소원대로 해주지 않는다. 신(神)이 자기에게 머물러 한 몸이 되어주려면 자기가 완전한 청정심(淸淨心)을 가져야만 되게 되어 있다. 신(神)이 자기 몸에 머물 수 있는 빈 공간을 넉넉하게 만들어 놓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온갖 욕심을 다 부리면서 신(神)까지 자기 몸이 되어주기를 원하면, 도리어 마구니가 와서 자기 몸에 머물려 신(神) 노릇을 한다. 특히, 신앙과 일상생활을 완전히 따로따로 지내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있는 현상이다.
비(非)신앙인은 현실에서 권력이나 돈을 가지고 자기 몸을 장대하게 만드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相)을 자기 몸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결국은 왜소하게 되는 비참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법신(法身)을 제외한 모든 몸은 멸(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더더욱 자기 몸의 크기에 집착한다. 한평생 살다 보면 그뿐이라는 단생적(單生的) 사고방식 때문이다. 불행히도 내세의 과보가 입을 크게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석가모니불께서 몸이 장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큰 몸은 이름만 그렇지 실제 큰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커 봐야 그 몸은 때가 되면 사라지고, 또 아무리 커 봐야 자기보다 더 큰 몸이 있으니 비교하면 왜소한 몸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상(相)의 몸을 가지고 키웠다 줄였다 하는 헛된 노력을 하지 말고, 이 우주에서 절대적으로 영원히 가장 큰 몸인 법신(法身)을 자기 몸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법신은 곧 무아(無我)이고, 무아가 곧 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