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4(25.구경무아분13)

내가 무엇을 해도 중생구제행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자.

수보리 보살 역여시 약작시언 아당멸도 무량중생 즉불명보살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 無量衆生 卽不名菩薩)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이런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하리라 한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보살이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하리라고 한다면 왜 보살이 아닌가? 그러면서 앞에서 말씀하신 큰 몸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 이전에는 보살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상(四相)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라고 하셨다.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한다면 그 몸이 얼마나 한량없이 큰 몸인가? 그렇게 되어야만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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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살(菩薩)이라고 하면 원래 그 의미가 부처 또는 여래로서 법신(法身)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보살은 당연히 아인중생수자상(我人衆生壽者相)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낸다면 이 상(相)에 걸리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법신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색신(色身)이 작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색신(色身)이 작용하면 한계가 생기게 되고 처음 발(發)하였던 마음이 중생 멸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어찌 보살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참 이상하지?


보살은 당연히 중생을 구제하는 분인데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을 하고 중생구제를 하면 오히려 중생구제를 못하게 되니 보살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


또 반면 그런 중생구제를 하겠다는 마음도 없이 어찌 중생을 구제하는가?


또 중생을 구제하지 않으면 보살이 아닌가?


자, 여기서도 생각과 행(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의 존재(存在) 문제가 나온다.


자기가 보살이 되어 있으면 모든 행(行)은 저절로 중생구제행이 된다. 반명 중생구제행을 한다고 모두 보살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보살이 일단 움직이면 그냥 중생구제행이 되어버리는데, 따로 중생을 또 멸도하겠다는 생각과 마음을 내니 자기 존재와 떨어진 의식을 또 하나 가지는 것이 된다.


이른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보살과 중생구제행(行)이 저절로 되는 보살, 이 둘로 나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중생이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보살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법신(法身)이 있으면 법신일 뿐이지, 법신과 별개로 또 큰 몸을 가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응신(應身)과 화신(化身)은 법신(法身)과 별개로 있는 몸이 아니라, 법신의 상(相)이고 용(用) 일뿐인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애써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나 마음이 없어도 내가 그냥 하는 모든 행(行)이 저절로 중생구제행이 되어버리니 참으로 원만무애(圓滿無碍)한 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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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힘들 것도 없고, 당연히 중생구제행에 따르는 고통도 없고, 따라서 구제를 받는 중생도 구제받은 자기가 따로 없게 되니 저절로 원만해지고 자연스러워지니, 참 진정한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일컬어 무위(無爲)라고 한다.


우리도 내가 하는 모든 행이 저절로 자리이타행이 되는 존재로 잘 바꾸어가 보자.


무공용(無功用)의 행(行)은 자타(自他) 모두에게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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